국가신용등급 하락 왜?… 일본 언론인들에 묻다
입력 2011-02-10 18:02
요즘 일본보다 일본을 더 걱정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지난달 27일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일본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내린 것이 계기가 됐다.
분석이 쏟아졌다. “복지지출 증가로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라는 주장을 “무리한 토목사업과 감세조치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되받는 형국이다. 핑퐁 게임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다.
코끼리 더듬는 장님 꼴을 면하기 위해 장님과 코끼리 모두를 잘 아는 서울 주재 일본 기자를 1일 만났다. 32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는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70)씨. 그는 “비빔밥은 양두구육의 음식” “한국은 스스로 일본을 내쫓지 못한 울분 때문에 끊임없이 일본을 괴롭힌다” 등의 발언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일본인 중 손꼽히는 지한파다. 경제신문인 니혼케이자이의 시마야 히데아키 서울 특파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소비 중인 ‘일본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과도한 복지 때문이라고?
에둘러 말할 줄 알았는데 답변이 명쾌했다. 구로다 지국장은 “복지 때문에 일본 재정이 축났다는 주장은 과장”이라고 잘라 말했다.
“과도한 복지 때문에 일본 나라 빚이 늘었다고 말할 순 없어요. 복지정책 중 불필요한 건 없어요. ‘복지가 과하다’ 이런 의견은 일본에서는 거의 없어요.”
한국의 국가부채 상황이 일본을 보며 겁을 집어먹을 정도는 아닌데, 한국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일본은 저성장 국가라 돈이 안 걷히지만 한국은 아직 고성장 국가잖아요. ‘한국은 매년 5∼6%씩 경제 규모가 확대되는데 재정 문제가 뭐가 있을까’하는 게 일본인들의 시각이에요. 분배에 있어선 한국이 일본보다 유리한 상황이죠. 그런데도 국가부채 논란이 빚어지는 건 내년 대선 때문인 것 같아요. 복지는 전통적으로 좌파의 논리죠. 복지는 싫어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주 강력해요. 좌파가 이길 수 있죠. 이를 막기 위한 한국 우파의 방어논리가 ‘일본이 복지 때문에 빚더미에 올랐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민주당의 복지정책이 비판받고 있는 건 사실이다. 50년 만에 집권한 일본 민주당은 ‘1인당 매월 2만6000엔(약 35만원)의 자녀수당 지급, 1인당 연간 11만8000엔(약 159만원)을 투입해 고등학교 교육 무상화, 고속도로 전 구간 무료화’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집권 후 집행 액수를 줄였지만 재원이 부족해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마야 기자는 “재원이 없고, 현실성이 없는 공약이었다는 것을 알고 유권자들이 실망하고 있다”고 했다.
구로다 지국장도 이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비판의 초점이 조금 다르다고 했다. ‘복지에 쓰는 돈을 줄이라’가 아니라 ‘복지에 돈을 제대로 쓰라’는 게 핵심이라고 전했다.
“현금을 뿌리는 민주당식 복지정책을 ‘바라마키(마구 뿌리기)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일본에선 ‘역시 바라마키는 안되지 않느냐’는 여론이 강합니다. 예를 들면, 출산장려책으로 아동수당을 쥐어주는데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탁아시설이거든요. ‘그 돈으로 지하철역 인근에 탁아시설을 지어주면 좋겠는데 왜 돈만 뿌리는가’하는 비판이죠. 돈 쓰는 방식에 대한 얘기지 복지 자체를 문제 삼는 지적은 없어요.”
국가부채는 정치 리더십 부재 탓
과도한 복지 때문이 아니라면 한국 진보진영이 말하는 대로 대규모 건설 공사와 감세 때문에 일본은 빚더미에 앉게 됐을까. 구로다 지국장은 “그렇다”고 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보수정권 시절에 공공사업, 토목을 포함한 도로건설 등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국가부채가 누적돼 왔습니다.”
그는 일본 민주당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됐고, 결국 신용등급 하락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자민당 정권 말기에 장기적으로 국채를 줄이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어요. 민주당 정권은 예산 낭비 줄여서 복지를 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안됐죠. 리더십이 자주 바뀌고 정책이 확실한 방향으로 추진되지 않은 거죠. 일본 국민들은 신용등급 강등에 대해 충격받지 않았습니다. 납득했죠. ‘외부에서 그렇게 보는 건 당연하다’고.”
시마야 기자도 리더십 문제를 꼽았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바로 정부의 정책 실행력이다. 일본은 증세가 필요하다면 증세를 하고, 불필요한 세출은 삭감하는,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는 힘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나 토목공사, 둘 다 재정적자의 원인으로는 그다지 영향이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복지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서 감세나 공공 공사를 늘린 적이 있지만 경기자극의 수단으로 옛날에는 제법 유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살아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세입이 늘지 않았고 국가부채를 줄이지 못했습니다.”
증세 없는 복지냐, 증세하는 복지냐
복지 논쟁과 관련해 일본은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 있다. 구로다 지국장은 한국 우파들이 참고할 사례는 따로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전반에 혁신지방정권(일종의 좌파)이 많이 등장했어요. 사회당과 공산당 추천으로 당선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미노베 료키치 도쿄 도지사가 대표적이었어요. 의료 교육 주거와 관련된 복지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주부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죠. 이 시절에 일본에 복지란 말이 처음 정착했어요. 3기 12년 동안 재직했죠.”
미노베 도지사는 노약자에 대한 무료 복지혜택, 오염규제 법안 제정, 재일 외국인에 대한 의료보험 혜택 실시 등의 정책을 폈다. 하지만 1979년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가 도쿄 도지사에 당선됐다. “이대로 가면 도쿄도는 파산한다”는 주장이 유권자에게 먹혀들어간 것이다.
구로다씨는 “한국 우파는 차라리 이 시절을 인용하는 게 옳다”고 조언(?)했다.
일본은 고령화로 인한 복지재정 증가, 국가부채 감소 등을 위해 증세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중이다. ‘감세 vs 증세’는 한국에서도 논쟁이 치열한 주제다.
시마야 기자는 “고령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고부담-고복지’인가, ‘저부담-저복지’인가, 어느 쪽을 지향할지 국민적 차원의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일본은 이런 점에 소홀했다”며 “증세는 피할 수 없다고 사회적으로 의견 일치를 서서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구로다 지국장은 저성장 시기가 올 때를 대비해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 지금 그 문제에 부닥치고 있어요. 일본에선 증세로 가닥이 잡히고 있죠. 소비세를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이슈예요. 고령화 사회에서 증세는 피할 수 없어요. 감세를 하면 반드시 다른 측면에서 증세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일본은 법인세 상속세를 내리는 대신 소비세를 올리려 하죠. 문제는 설득입니다. 정치적 쟁점이 될 겁니다. 이 문제가 거론되면 야당은 반드시 반대할 거예요.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을 겁니다.(웃음)”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