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즈펠드 전 美국방 회고록서 공개… “美, 2006년 北 대포동2호 요격 검토했었다”
입력 2011-02-09 18:44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2006년 발사했을 때 미국이 요격을 검토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또 강력한 대북 압박 결과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 전복 세력이 결집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은 8일(현지시간) 발매된 회고록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Known and Unknown)’에서 이 같은 사실들을 밝혔다. 2001∼2006년 국방장관을 지낸 그는 북한과 이라크에 강경책을 쓴 네오콘의 핵심 인물이었다.
◇대포동 2호 요격 검토=럼즈펠드 장관은 “적의 미사일이 발사된 후 몇 초가 결정적 시간이며, 바로 요격이 결정돼야 하는 점을 감안해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요격미사일 발사명령을 위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부시 대통령과 나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따라서 미국은 2006년 7월 4일 대포동 2호가 발사될 당시 국방장관 전결로 이에 대한 요격이 가능했고, 실제 미사일 요격을 검토했었다는 것이다. 럼즈펠드는 “독립기념일인 4일 오후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가던 중 체사피크만 다리를 건너자마자 갓길에 차를 세워야만 했다”며 “수행 중인 통신장교가 티머시 키팅 북부사령관과 제임스 카트라이트 전략사령관을 보안통신망으로 연결했다”고 술회했다. 이어 “그들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방금 발사했으며, 발사 궤도가 미국을 향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요격 명령을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고 적었다.
럼즈펠드는 “북한이 어디까지 미사일을 날려 보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군과 정보당국은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거의 확실한 사정권 내라고 판단했었다”면서 “하지만 탄도미사일은 42초 후 북한 영역 내로 떨어져 요격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즉시 발사할 수 있는 10개 이상 요격 미사일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있었고, 실험을 통해 탄도미사일 요격 능력이 입증됐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당시 실제로 대포동 2호를 요격했다면 북한의 보복적 행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북 압박이 군부 내 반란 유도 판단=럼즈펠드는 “북한에 돈과 기름을 주는 대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강력한 외교·경제적 압박을 가하면 군부 내 고위장성 일부가 김정일 체제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하지만 2006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수석대표는 북한 이슈가 국무부의 것이며 국방부 관점은 중요치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또 “중앙정보국(CIA)에서 베테랑 전문가로 경험을 쌓은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아·태 부차관은 아예 논의 과정에서 제외됐다”며 부시 정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북한 이슈에서 국무부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고 밝혔다.
럼즈펠드는 “라이스 장관과 힐 수석대표는 북한과 합의로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서 “하지만 김정일 체제의 권력유지 수단이 핵무기 추구이기 때문에 그걸 포기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한국의 관계 재정립 요구를 미국이익의 반영 계기로=럼즈펠드 장관은 2002년 12월 23일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부 정책차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한국 대통령 당선자(노무현)가 한·미 관계를 검토하길 원한다고 언급해 왔다”면서 “반대할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는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면 한반도 불안을 일으킨다고 비난받았을 거지만,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라며 “이제 양국관계를 재조정해 한국인들에게 부담을 넘겨야 한다”고 밝혔다.
럼즈펠드는 200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했을 때 한국 여기자로부터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지구 반대편 이라크에 가서 죽고 다쳐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한국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절친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왜냐고요, 50여년 전 미국이 젊은이들을 지구 반대편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라며 서울의 고층 빌딩 스카이라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고 썼다. 그는 당시 한국 내에서의 이라크 파병 논란에 대해 “50여년 전 미군 참전으로 자유와 경제적 성공을 거둔 한국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라크 WMD 의심시설 폭격했어야=이라크전 개전을 몇 주 앞둔 2003년 2월 NSC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쿠르말에 있는 화학무기 개발 의심시설 폭격을 제안했다. CIA 첩보가 “상당한 규모의 테러리스트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럼즈펠드 장관은 이틀 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유엔에서 이라크 침공계획을 발표할 때 해당 시설 폭격을 언급함과 동시에 작전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월 장관의 거부로 폭격은 무산됐다. 럼즈펠드는 “예상대로 파월의 연설이 끝난 직후 테러리스트들이 쿠르말에서 도주했다”면서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WMD 관련 증거를 확보했을 것”이라고 썼다. 미국은 지금까지 WMD 시설을 찾아내지 못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전 준비를 여러 차례 논의했었다”면서 “전쟁이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대통령이 내게 물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