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춥다고요 장갑 꼭 끼세요”… 노숙인과 노숙하며 거리 전도 김영식 목사

입력 2011-02-09 18:59


지난 6일 서울역에서 만난 김영식(46) 목사는 인터뷰 내내 웃었다. 지난 삶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을 때도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은 전이됐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상대를 웃겼다. 그는 이를 전도(傳導)라고 불렀다. 고온에서 저온으로 열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열전도와 같은 이치다. 김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傳道)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신앙이 먼저 뜨거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노숙인과 노숙하는 목사다. 서울역과 영등포역, 둔촌동 등에서 노숙인과 살을 부비며 지낸다. 순대 떡볶이 튀김 등을 나누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한다.

매 맞기도 한다. 잠 잘 자리를 침범했다고 맞고 거치적거린다고 맞았다. 노숙인들은 먹을 것 잘 먹다가도 “돈 지랄한다”고 때리고 “너 혹시 딴 마음 있어 이러는 거 아니냐”며 때렸다. 그런데도 복음을 전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힘들다면서도 웃고, 맞으면서도 웃고 그러면 노숙인들이 궁금해 한다. 그때 “내 안에 예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노숙인들이 달라지냐고? 달라진다. “아, 그 이씨 말이야. 글쎄, 막일 나간다는 얘기가 있어. 집에 들어갔다는 소리도 있고.” 또 이런 이야기도 들린다. “그 이씨도 김씨처럼 떡볶이 사주면서 예수를 전한다나 어쩐다나….”

갑자기 실업자 신세

김 목사는 이날 지인을 여럿 만났다. 노숙인이다. 형님 동생이라 부르는 사이다. 앞니가 모두 빠진 한 노숙인은 “동생, 건강 챙겨”라고 인사한다. 술에 절어 쓰러져 있는 노숙인은 귀마개와 장갑을 건네는 김 목사를 밀쳐낸다. 귀찮다는 투다. 하지만 김 목사는 “형님, 춥다고, 장갑 끼라고”라며 억지로 떠 넘겼다.

김 목사는 3년 전만 해도 노숙인과 상관없었다. 5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행정목사였다. 담임목사와 함께 교회를 개척해 대우도 좋았다. 침신대, 서울신대원을 졸업하고 5년간 목회 실습을 거쳤다. 행정목사라는 위치는 교회를 개척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2009년 3월 그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담임목사가 바뀌면서 설자리를 잃었다. 그는 대책 없이 사의를 표명했다.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다. 목회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돈 벌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내와 10대 두 딸의 자는 모습을 마냥 바라보곤 했다.

“‘이 아이들만 없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꿈이길 바랐어요. 잠이 깨면 다시 예전의 안정된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길 바랐지요. 그땐 그랬습니다.”

또래의 중년 남성 노숙인으로 넘쳐

절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럴 때는 거리를 배회했다. 그해 9월. 이날도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둔촌동에서 출발, 천호대교를 건너 새벽 3시쯤 뚝섬 한강공원에 닿았다.

그 시간 공원은 전쟁터였다. 어떤 이들은 멱살잡고 싸웠다. 어떤 이는 술에 취해 바닥에 꼬꾸라져 있었다. 자해를 해 피 흘리는 이, 떠나버린 가족을 큰소리로 저주하는 이, 자살하겠다며 한강에 뛰어들려는 이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이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저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이들이었어요. 이전 같았으면 ‘인생의 실패자’라며 외면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날은 안타깝고 보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나는 그래도 신앙이 있는데, 이들은 어쩌나 싶고….”

김 목사는 그 길로 인근 교회를 찾았다. 3일 동안 울면서 기도했다. 목사로서 이제까지 뭐했는지 싶었다. 목회는 밥벌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진정한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특히 노숙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달라고 기도했다.

너 예수쟁이 아냐?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같이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다. 노숙인들 설움을 들어주며 밤을 보냈다,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같이 먹고, 사무실 복도 등에 내놓은 먹고 남은 음식을 뒤져 먹으며 어울렸다. 술에 취해 방치된 노숙인을 일일이 챙겼다. 사실 그의 처지나 행색도 노숙인과 다름없었다. 그러고 날이 밝으면 집에 갔다.

먹을 것도 사 날랐다. 순대 떡볶이 만두를 샀다. 술을 권하면 “너무 많이 마셔 간에 구멍이 났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노숙인들 눈에는 이것이 이상했다. 득 되는 것 없이 이야기 들어주고 먹을 것 사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술도 안 먹었고 날이 밝으면 없어지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얼굴이 밝았다. 항상 웃었다.

노숙인이 물었다. “이봐, 뭐가 그리 좋다고 실실 웃어. 당신 뭐하는 사람이여. 예수쟁이 아냐. 예수쟁이지? 이거 목사 아냐?”

그러면서 멱살을 잡았다. 얼굴을 때리고, 내동댕이쳤다. 쓰러지면 복부와 등을 찼다. 한 노숙인은 머리 위에 오줌을 누었다.

살해 위협까지 느껴지던 폭행 현장

하지만 그때 복음이 전해졌다. “멀리서 지켜만 보는 노숙인이 있어요. 사람들이 사라지면 다가와서 물어요. 뭐가 그리 좋으냐고요. 그럼 얘기하죠. 부모님 계시니 좋고, 살아 있으니 좋고, 또 예수님이 계셔서 좋다고요.” 이 말에 어떤 이는 눈물을 쏟았다. 방언이 터지기도 했다. 김 목사는 “이게 전도구나, 복음이 이렇게 전해지는 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렇다고 처지가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월세 내는 것, 먹고 사는 것이 걱정됐다. 노숙인을 위한 먹을거리 살 돈이 부족했다. 그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새벽 2시에 청소차 보조를 했다. 그것이 끝나면 건축현장에서 일했다. 식당 설거지부터 배달까지 돈 되는 것은 모두 했다. 주차관리 대리운전도 했다.

그렇게 돈이 생기면 또 순대와 떡볶이를 사들고 역으로, 공원으로 향했다. 그러다 또 맞았다. 누군가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으면 또 복음을 전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맞은 적도 있다. 지난달 너무 추울 때 공원에서 잠자던 노숙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추운데 공원 화장실로 가는 게 어떠세요” 그랬더니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주먹질을 했다. 주위에 있던 세 명의 노숙인이 가세했다. 머리며 가슴 배를 가차 없이 때렸다.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겨우 빠져나와 집에 갔는데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무릎에는 심한 상처가 났는데 몇 번 넘어질 때 무언가에 찍힌 것 같아요.”

아직 갈길 멀어 ‘내일도 오늘처럼’

그런데도 그는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편안하게 목회할 때는 배가 불렀지만 영혼이 메말랐던 것 같아요. 지금에서야 예수님의 사랑이 뭔지 알 것 같고, 비로소 목회자가 된 것 같아요.”

가족들도 행복해 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노숙인 사역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가 반대하면 그만 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돌아보게 된 것 자체가 축복이라며 걱정 말라는 거예요.” 그의 아내는 요즘 월 100만원 정도를 받는 경리 일을 한다. 아이들도 “우리 아빠는 진짜 목사님이셔”라며 자랑한다.

갈 길은 아직 멀다. 하지만 걱정도 고민도 없다. 노숙인과 노숙하며 ‘내일도 오늘처럼’이라는 목회 철학도 얻었다. 내일도 오늘처럼 열심히 일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확신이다.

최근에는 예배를 위한 작은 공간을 놓고 기도 중이다. 노숙인 전도에 그치지 않고 양육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감히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다미안 선교사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노숙인에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 전병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