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임도경] ‘위대한 소시민’의 시대
입력 2011-02-07 18:07
“허울뿐인 학위보다는 똑 부러진 기술 하나가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처음 가진 꿈은 대부분 소박했다. 나중에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식의 ‘원대한’ 꿈을 입에 담게 된 것은 학교에 다니며 사회성을 갖게 된 이후였을 듯하다. 그래야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걸 알아채고 난 후 다들 그렇게 꿈을 포장해 갔다.
어른이 된 후 어린 시절 첫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갖가지 재미있는 직업이 튀어나온다. 그중 일등은 만화가게나 자장면집 주인이다. 동심으로 바라보는 만화가게 주인은 만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책 부자였고, 중국집 주인은 맛 좋은 자장면을 매일 먹을 수 있는 부러운 어른이었다.
하지만 등수를 매기는 고단한 경쟁사회에 던져지면서 이런 꿈은 결코 사회적 승자의 소망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고도의 경제성장기에 청소년 시절을 거친 40∼50대 세대들은 자녀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부모들의 희생을 바라보며, 성공의 상징인 몇몇 전문직을 향해 치열하게 다투며 성장해야 했다.
이제 이들 중 1%는 사회 중추세력이 됐다. 하지만 범부로 살아온 대부분은 서서히 퇴직을 준비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도 기죽을 것 없다.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인생 이모작에 도전해봄 직하다. 이제 직업의 귀천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한 가지만 제대로 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됐다. 취업 못한 박사보다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기술자가 더 어깨 펴는 시절이다.
그 변화를 모 방송사의 장수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2005년에 시작해 6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한 가지 일에 능통한 작업자를 찾아내 ‘달인’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일이든 그 분야의 최고면 누구나 달인이라는, 일종의 ‘달인 신드롬’을 만들어낸 진원지이다.
방송에 등장하는 달인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의 관심권 밖에 있던 일상생활의 뒤편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단순한 노동을 남과는 다른 정확성과 속도감으로 해치우는 실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작업에 대해 이들이 갖는 태도는 달랐다. 하나같이 자신의 일에 긍정적이고 열정이 있었으며, 생계를 해결해 준 그 일을 오랜 기간 해올 수 있었다는 데 감사했다. 그리고 삶에 겸손했다.
지난 설 특집 프로그램에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생이 역전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방송됐다. 피자로 달인 칭호를 받은 피자가게 청년은 전국에 10개의 체인망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고속도로 휴게실을 돌면서 자판기 캔을 채우는 일을 하는 한 청년은 방송 후 일의 숙련도를 인정받아 승진을 했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차림새도 말쑥하게 바꿨다고 한다. 이들의 얼굴에서 어떤 일을 해도 최고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이 보였다.
물론 이들을 이런 식으로 등장시키는 데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대체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집중적인 노동량을 정당화시킨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놓치는 것이 있다. 관심의 뒤편에 있을 그들을 찾아내 ‘달인’ 경지를 인정해 줌으로써 직업적 자부심을 심어주고, 사회적으로는 오랜 관습처럼 굳어진 직업의 경계를 깨는 긍정적 역할이다. 짬뽕의 달인이 된 한 청년의 아버지가 흘린 감동의 눈물은 ‘사’자 들어가는 전문직에 들어선 자식을 바라보며 부모가 흘린 기쁨의 눈물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런 ‘위대한 소시민’들은 허울뿐인 학위보다는 똑 부러진 기술 한 가지가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실생활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다. 이름 석 자 내놓고 사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논쟁으로 국론을 분열시킬 때 이들은 자신의 일터에서 묵묵히 땀을 흘려주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무지 많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입신양명족들로 혼탁한 이 세상, 기발한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만화가게 주인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자장면을 만드는 중국집 주인을 당당하게 꿈꾸는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임도경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