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장군의 존재감

입력 2011-02-07 18:06


1415년 10월 25일 프랑스 작은 마을 아쟁쿠르 인근 평원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투는 영국이 프랑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전투였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계승권이 영국에 있음을 주장하며 6개월 전 1만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이날 새벽 아쟁쿠르에 도착한 영국군의 상태는 처참했다. 6개월간 계속된 전투와 행군으로 병력은 6000여명으로 줄었고 이질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는 병사들도 많았다. 게다가 전날 밤 비를 맞으며 행군한 탓에 영국군은 차가운 새벽 공기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영국군은 2만여명의 프랑스군이 자신들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유럽 최강의 군대로 최고의 갑옷과 칼, 전쟁용 도끼와 창, 철퇴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전투는 시작도 하기 전에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헨리 5세는 탈진 상태에 있는 병사들을 향해 유명한 ‘성 크리스핀 축일의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전투에 참가할 용기가 없는 자는 떠나라. 그런 자들에게는 허가증을 발급해주고 여비도 줄 것이다. 우린 우리와 같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들과 같이 죽고 싶지 않다”며 “오늘은 성 크리스핀의 축일이다. 오늘부터 세상의 종말까지 영원히 그날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나와 같이 피를 흘리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국군은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당시 새로운 병기였던 장궁(長弓)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자신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행군하는 왕의 존재와 피를 끓게 하는 그의 연설로 고무된 영국군의 투지가 원동력이었다.

전 유럽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휴식 중일 때는 병사들의 캠프에서 그들과 어울리곤 했다. 그는 병사들의 이름과 이력, 심지어 그들이 어느 전투에서 부상했는지도 기억했다. 때로는 병사들의 귓불을 꼬집으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볼 때면 감전된 듯한 느낌을 가졌다. 나폴레옹의 존재감은 병사들에게는 승리의 보장처럼 느껴졌다.

나폴레옹은 대규모 전투를 앞뒀거나 군의 사기가 저하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그들이 지휘관과 함께 역사를 만들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어떤 부대가 선봉에 서거나 곤경에 처하면 그는 말에 올라타 이렇게 외쳤다. “나는 자네들을 아네! 진격해 저 마을을 프랑스의 것으로 만들어주게.” 나폴레옹의 격려에 병사들은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다.

이처럼 장군의 존재감은 병사들 사기의 근원이 된다. 지휘관이 자신들과 함께 힘든 훈련을 받고 현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높여준다. 최근 우리 군의 장군들이 병사들과 함께 거친 훈련에 동참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육군참모총장은 지난달 4일 강원도 평창 황병산에서 특전사 설한지 극복훈련에 참가했다. 공군참모총장도 27일 역대 총장 가운데 처음으로 F-5를 타고 실사격 훈련을 지휘했다. 또 특수전 여단장을 지낸 해군 제독들은 지난 1일 경남 진해 해군 특수전여단(UDT/SEAL) 훈련장에서 장병들과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병사들이 훈련하는 내용과 어려움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대관리와 지휘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 같은 장군들의 충정이 일각에서는 전시용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병사들의 임무와 장군의 역할은 다르다. 세계적인 고전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철저하게 지성의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현장을 모르는 장군보다 무지한 장군이 더 위험하다는 의미다. 지난해 연이은 북한 공격에서 확인됐듯 도발이든 국지전이든 같은 양상으로 반복되는 전투는 거의 없다. 미국의 장군들이 끊임없이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장군들을 보고 싶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