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 이래도 ‘CSI’의 아류라 할텐가
입력 2011-02-07 21:09
‘한국형 범죄수사물’ 30∼40대 시청자 큰 호응
익숙한 미제사건 연상… 사회적 메시지도 전달
SBS ‘싸인’(수·목 오후 9시55분)은 지난 1월 방영 전부터 미국 드라마 ‘CSI’ ‘본즈’ 시리즈와 비교가 됐다. 하지만 총 20회 가운데 절반이 방영된 현재 ‘싸인’을 말할 때 다른 작품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이면을 폭로하는 과감한 소재와 극적인 전개로 ‘한국형 범죄수사물’이란 장르를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수사물은 어둡고 음침한 소재 때문에 안방시장에서 성공한 전례가 드물지만 ‘싸인’은 30∼40대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순항중이다. 지난 7회부터는 경쟁작인 MBC ‘마이 프린세스’를 따돌리고 16∼17%대의 시청률로 수목극 1위를 지키고 있다. SBS는 당초 16부작에서 20부작으로 편성을 늘렸다.
‘시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천재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의 신념이다. 신참 부검의 고다경(김아중)도 시체의 원혼을 듣기 위해 메스를 들었다. 이들에게 온 시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사회 권력을 들춰내라고 말한다.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미제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1회 다뤄진 한류스타 서윤형의 죽음은 가수 고 김성재 사건과 겹쳐진다. 이 사건은 진범을 숨기려는 거대 권력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윤지훈과 고다경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한다. 베일에 쌓인 권력의 중심에는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는 실세 정치인이 있다. 유명 로펌 변호사 장민성(장현성) 이명한(전광렬) 국과수 원장은 여기에 가세해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9∼10회부터 전개된 ‘미군 조폭 총기 사건’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자국민의 안위를 포기한 국가권력의 부끄러운 단면을 드러낸다. 한·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치권력은 미군에 의해 조폭들이 살해된 사건을 조폭 사이의 살인 사건으로 갈무리한다.
주인공들은 여느 범죄수사물에서 볼 법한 날카롭고 치밀한 분석을 해나간다. 윤지훈은 조폭 총기 사건이 벌어진 술집을 찾아가 혈흔을 일일이 분석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수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미약한 증거가 아니라 그들을 막으려는 권력이라는 점은 ‘싸인’이 사건 자체에만 집중한 ‘미드’식 범죄수사물과 궤를 달리 한다. ‘트럭 연쇄 살인사건’이 좋은 예다. 이명한 원장은 시체를 보고 단순 뺑소니 사고로 진단한 반면, 윤지훈은 뺑소니를 위장한 타살이라고 판단한다. 이는 나중에 이명한 원장이 오판에 대한 수치심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 원장의 조직원들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윤지훈 아버지의 죽음과 이명한 원장이 관련된 ‘20년 전 사건’을 큰 줄기로 하면서 개별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서사 구조도 이 드라마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피해자의 원한과 사건의 진실을 거대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국과수 내부 구성원 간의 권력관계 등을 보여주며 흥미롭게 얘기를 풀어냈다”고 평했다.
9일(11회)부터는 ‘20년 전 사건’이 본격적으로 실체를 드러낼 예정이다. 또한 대기업 직원의 의문사 등 사회의 폐부를 드러낼 사건들도 펼쳐진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