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김충선 이충성 그리고 한·일 FTA
입력 2011-02-07 17:36
김충선(金忠善)은 사야카(沙也可)라는 이름의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였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左)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정병 3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순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어 그는 바로 그 전란에서 조선의 장수로 활약했고 선조 임금은 그의 공을 높이 사 성명을 하사했다. 이후 정2품까지 오른 그는 현재의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터를 잡고 사성(賜姓) 김해 김씨 집성촌을 일궜다. 그렇게 김충선은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됐다.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한국기행’(1978)에서 우록리를 답사하고 사야카의 실존을 확인한다. 그런데 시바는 김충선이 썼다는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후대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모하당문집은 사야카의 귀순을 ‘조선 예교(禮敎)에 대한 흠모’ 때문이라고 쓰고 있으나 시바는 당시 일본의 일반 사무라이가 유교를 알 턱이 없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21세기 양국 협력 절실하다
일본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사야카가 누군지, 왜 귀순했는지 등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조선을 흠모한 때문인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반대 노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일군의 병사들과 함께 귀순해 조선 장수로 활약한 점은 견해를 같이 한다.
분명한 점은 사야카가 자기 나름의 의미 있는 생존방식을 택했고 그의 행보가 한·일 사이의 오랜 애증관계에 특별한 역사를 첨가했다는 사실이다. 400여년을 훌쩍 건너뛰어 양국 간 또 한 번의 특별한 역사가 기록됐다. 얼마전 벌어진 2011년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대표팀 이충성 선수 얘기다.
이충성은 재일교포 4세로 2007년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본이름은 리 다다나리(李忠成)다. 성씨는 그대로 유지하고 이름만 일본식 한자읽기로 바뀌었다. 재일교포 축구평론가 신무광은 ‘조국과 모국과 축구’(2010)에서 이충성의 귀화에 대해 “그는 국적이나 민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축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선수는 2004년 한국청소년대표팀(19세 이하) 후보로 발탁됐으나 한국말이 서툰 데다 ‘반쪽바리’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와 같은 한국 사회의 재일교포에 대한 몰이해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그는 의미 있는 삶을 향해 열심히 준비했고 마침내 이번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일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김충선과 이충성의 결단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마치 21세기 한·일 협력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듯하다. 양국 간에는 여전히 과거사의 앙금이 쌓여 있고 건너기 어려운 깊은 고랑이 가로놓여 있지만 양국을 둘러싼 정세는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양국은 최근 두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중국의 부상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양국 모두 중국이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 갈지 모른다. 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동아시아의 상품시장 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中 견제와 역내 시장 확대를
한·일 양국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시장을 찾아내야 할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2004년 가을 결렬된 이래 더 이상 열리지 않고 있다. 양국 모두 한·일 FTA의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각각 내부의 반발을 충분히 조율하지 못했던 탓이다. 특히 일본 농수산업계의 반발이 컸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일본 정부는 ‘포괄적 경제연계에 관한 기본방침’에서 “민감 품목에 대한 배려를 하면서도 모든 품목을 자유협상 대상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내부 허들을 뛰어넘겠다는 일본 측 선언이 나온 만큼 한·일 FTA 협상은 올해 본격 재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양국의 역사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이 추가되기를 기대한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