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장군 김취려 거란·몽고 침입 어떻게 막아 냈나… 한국중세사학회 2월 11·17일 재조명

입력 2011-02-07 17:29


13세기 초는 금(여진)과 거란, 몽고가 북방의 패권을 두고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생존 게임을 벌이고, 고려와는 줄곧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던 한족의 나라 송(宋)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시기였다. 12세기 금이 흥기했을 때는 전쟁도 치르지 않고 금에 사대의 예를 표했을 만큼 유연했던 고려지만 13세기엔 몽고의 침입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다. 이 사이 고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중세사학회는 오는 11일과 17일 각각 울산 롯데호텔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학술회의를 갖고 몽고 침입 직전 고려의 역사를 김취려(1172∼1234) 장군의 생애를 통해 되돌아본다. 김취려는 구국의 영웅이지만 그동안 강감찬·이순신 장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조명을 받아왔다.

◇여진·거란·몽고 틈바구니에서 나라 지켜내=1206년 칭기즈칸이 몽고족을 통일하고 칼끝을 금에 겨누면서, 금의 국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요 멸망 후 금에 복종하고 있던 거란족은 이 틈을 타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러나 몽고의 칼이 거란족이라고 비껴갈 것인가. 몽고는 요나라 유민들이 세운 대요수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사정없이 거란을 두들겼다. 견디다 못한 거란인들이 1217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 북방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로마 제국 말기의 연쇄 ‘민족 대이동’을 연상케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고려는 최씨 집권시대로 무신정권 후반기였다. 1231년 원 태종 오고타이가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하기 불과 15년 전이었다.

김취려는 이 때 후군병마사로 참전해 제천 박달재 전투에서 10만명에 이르렀다는 거란군을 물리쳤다. 거란은 다음해에도 쳐들어와 동주(東州·철원)를 함락했으나, 상장군에 임명된 김취려는 또 다시 거란 병사를 쫓아냈다. 거란은 다음해인 1219년에 또 쳐들어왔는데 이때 침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북방에서부터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고군이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취려가 거란군을 쫓아 강동성까지 진군한 몽고 장군 합진찰라(哈眞札剌)와 대면했고, 강동성의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둔 뒤 몽고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고 한다. 거란을 마음껏 두드리고 세계의 패자로 화려하게 등극한 몽고와, 3차례에 걸쳐 침입한 거란을 끝내 패퇴시킨 고려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공주대 역사교육과 윤용혁 교수는 “김취려는 몽고와의 협력 및 외교관계 수립으로 전쟁을 피하고 후일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고려 병합 저지 논리 제공=무서운 기세로 유럽과 아시아를 점령한 몽고와의 외교관계 유지가 쉬울 수는 없었다. 몽고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했고, 1225년 몽고 사신 피살사건이 일어나면서 고려와 몽고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몽고는 1231년 고려에 침입했고 항쟁하는 고려의 강산을 30여년간 유린했다.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전쟁 피해를 키운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김취려가 몽고와 맺었던 동맹관계는, 고려의 항복 뒤 사사건건 불거진 ‘입성책동’(立城策動·고려에 원의 행정기구인 ‘성’을 설치해 원과 고려를 병합하자는 주장)을 분쇄하는 논리의 근거가 됐다. 14세기 원과 고려를 수차례 오가며 입성책동을 저지했던 유학자 이제현은 “원과 고려를 병합하는 것은 고려와 형제의 언약을 맺은 태조(칭기즈칸)의 뜻에 어긋난다”는 논리를 폈다. 윤 교수는 “김취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선견지명을 가진 외교관이었다”고 말했다.

김취려는 최고위 관직인 시중에까지 오를 정도로 영예로운 인생을 보내다 1234년 세상을 떠났다.

북방과 중원의 세력 교체기는 늘 불온했고, 한반도는 그때마다 암울한 전쟁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김취려는 거란의 잇단 침입을 막아낸 것은 물론 몽고라는 거대제국의 세력 확장에 맞서 뛰어난 외교술로 고려의 안녕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