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 이겨낸 매화가지에 봄이 피었다… ‘문봉선의 묵매화’전 2월 9∼27일 서울 공아트스페이스
입력 2011-02-06 16:58
아직도 붓과 먹을 고집하는 동양화가 문봉선(50·홍익대 교수)은 1990년 봄날, 우연히 화실 구석에 놓인 주간지에서 전남 순천 선암사의 홍매(紅梅) 사진을 보았다. 순간 ‘매화를 직접 현장에서 그려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고 다음날 바로 전라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곤한 잠을 깨우는 안내방송을 듣고 어렵게 찾아간 선암사는 매서웠던 겨울의 상흔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주문을 지날 무렵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매화향기였다. 만개한 매화가 눈송이처럼 하얗게 나무를 덮고 있었고,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인지 향기는 더욱 진했다. 중국 북송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가였던 왕안석(1021∼1086)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멀리서 눈 아님을 알 수 있음은 그윽한 향기 전해오기 때문이라네.”
그로부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정이 시작됐다. 매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다닌 20년의 세월이었다. 전남 광양 매화농원과 구례 화엄사, 지리산 단속사 등 곳곳에서 만나는 매화마다 화첩에 오롯이 담았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난징의 매화산 아래서 한 시절을 보냈고 일본 오사카 매원과 후쿠오카 신사 등을 샅샅이 다니며 연구하고 붓으로 매화를 그렸다.
그의 붓끝에서 살아난 매화의 풍미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시가 9일부터 27일까지 ‘문봉선의 묵매화-문매소식(問梅消息)’이라는 타이틀로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희고 붉은 매화와 젊고 늙은 매화까지 60여점을 선보인다. 매화는 긴 겨울을 이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며 그 기상이 군자와 같다 하여 사군자(매란국죽) 중 으뜸으로 일컬어진다.
이번 출품작 가운데 어스름한 기운의 달빛 아래 꿈틀거리는 모습을 담은 매화는 추운 겨울을 지나 이제 곧 봄이 오리라는 계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또한 꽃이 막 피어나기 직전의 순수한 모습과 오랜 풍화를 견뎌내고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폭설을 뚫고 나오는 홍매화의 당당한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작가의 필치를 통해 만끽할 수 있다.
“광양 매화농원에서 하루는 그림이 될 성 싶은 가지나 줄기를 찾아 사생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가지치기를 하던 농부 한 분이 화첩을 보더니 ‘요 가지에는 꽃이 달리지 않을 텐데…’ 하시는 거예요. 꽃이 핀 매화만 그리고 개화 전의 줄기나 가지의 골격은 놓친, 관념에 젖어 있던 정신을 화들짝 깨워주었지요.” 이번 전시에는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화첩도 나온다.
20년 동안 매화가 피는 2∼3월에는 씨 뿌리는 농부만큼이나 바쁘게 보냈다는 작가는 이제 “해마다 피는 꽃은 변함이 없건만 해마다 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똑 같지 않네”라고 노래했던 옛 시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고 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윽한 향기 여전한 매화의 풍류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붓질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것이다(02-730-1144).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