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2-06 17:13


(32) 전면적 충돌

예수의 길 그 마지막 상황은 충돌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도 전면적 충돌이다. 전쟁으로 말하면 전면전이다. 마가복음 12장을 읽어가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칼을 주러 왔다는 내용이다. 역설적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예수의 길이 끝나는 지점쯤에 가서 벌어진 상황은 우선은 직설적으로 총체적 충돌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예수님이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하늘 아버지의 소명을 품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제 삼일에도 당신의 길을 걸을 뿐이다. 다만 예수님이 걸어 길이 나는 걸 보고 저들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잡초가 무성해져서 이젠 아무도 걷지 않는 그 길이 예수님이 걸으면서 다시 길이 되는 걸 보고 저들이 긴장한다. 길은 길일 뿐이다. 참된 길은 사람이 걷는다고 길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걷지 않는다고 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사람과 상관없이, 그 길을 걷는 사람 수와 상관없이 참 길은 언제나 길이다.

유대인 사회의 권력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세 집단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이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사두개인은 성전 제사를 독점하고 있었다. 헤롯대왕의 정치 수하인 헤롯당은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세속 정치의 힘을 부리고 있었다. 12장 13절이 이렇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바리새인과 충돌하는 것은 벌써 한참 전이다. 마가복음에서 바리새인이 헤롯당과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는 시도는 벌써 3장 6절에 나온다. 12장에서 이들이 예수를 옭아매려는 질문이 이런 것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정치범으로 몰려 죽거나, 보수 신앙을 가진 유대인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은 저 유명한 말로 상황을 비껴간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번엔 사두개인들이 달라붙는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그들이다. 어느 여인이 시집가서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었다. 대를 이어주어야 하는 당시 관습에 따라 남편의 동생이 여인을 취했는데 그 역시 상속자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죽었는데 부활 후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다. 극히 교묘하고 치졸한 논쟁을 위해 구성된 얘기다. 예수님은 부활체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들의 논리를 잠재운다. 부활의 몸을 가지면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

논쟁으로는 예수님이 완승이다. 종교와 정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 집단을 보기 좋게 눌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파다. 이제 예수의 길은 더 위험해졌다.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그쪽에 서서 걷는 사람들이 다 위험하다. 전체 권력을 쥐고 있는 저들과 전면적으로 충돌하여 완승한 이후의 상황은 뻔하다. 죽음이다. 논쟁이 끝나면서 죽음의 기운이 강렬하다. 그렇구나, 십자가로구나! 신학자 선배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마가복음은 ‘긴 서론이 붙은 십자가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수의 길 마지막엔 십자가가 서 있다. 그건 예수님이 한 걸음씩 선택해가면서 의도적으로 방향을 잡은 길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내 여정에서 질문이 분명해진다. 십자가의 뜻은 무엇인가?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