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정태] 재벌도 권력도 무섭다
입력 2011-01-31 17:34
국내 최초 여성 대통령의 탄생 과정을 그린 TV 드라마 ‘대물’은 여느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지난 연말 종영된 대물은 인기가도를 달렸다. 과장된 면은 있지만 정치권과 검찰의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담겨 있어서다. 극중 하도야 검사(권상우 분)는 정치·재벌 권력에 맞서 거악을 척결하는 열혈파로 나온다. 돈키호테처럼 좌충우돌하지만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은 네티즌들로부터 하도야 검사로 불렸다. 외부와 타협하지 않는 강골(强骨) 검사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2003년 대검 중수1과장으로 발탁된 그는 여야의 불법 대선자금을 파헤쳐 성가를 드높였다. 지난해 7월 서부지검장 부임 이후에는 한화·태광그룹 비자금 의혹 수사를 지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한화 관련자 구속영장이 잇달아 기각되면서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 급기야 남 지검장은 지난 28일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먼지털기 식 수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청와대와 법무부가 문책 인사를 검토하자 이에 반발해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날개 꺾인 검찰의 재벌 수사
드라마 같으면 여기서 다시 반전이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검찰이 깊은 내상을 입었다는 점이다. 재벌과의 전쟁을 벌이는 중에 이례적으로 장수 교체가 거론되면서 결국 낙마로 이어졌다는 건 검찰로서는 충격적이다. 정치적 외압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잘못은 재벌이 저질렀는데 수사팀이 덤터기를 쓴 꼴이다. 그 결과 수사 동력이 떨어지면서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화·태광 수사가 막을 내렸다. 지능적 수법의 총수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도 못하고, 고전적 수법의 총수에 대해선 추가 조사를 위한 구금기한 연장도 포기한 채.
물론 재벌에 대한 무차별적 수사는 지양돼야 한다. 구속수사가 능사도 아니다. 그런 만큼 수사 패러다임이 바뀔 때도 됐다. 그러나 재계의 불만이 정치권에 전달돼 부당한 외풍이 검찰에 가해지는 것 또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권력보다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수사가 어렵다”고 남 지검장은 토로했다. 거친 수사방식으로 논란을 빚은 남 지검장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재벌의 반격에 더해 권력까지 개입할 경우 검찰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검찰 독립성을 갉아먹는 행위다. 지금도 검찰이 정권 눈치를 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제 누가 재벌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오히려 권력에 대한 맹종만 부를 뿐이다.
외압 논란에 회전문 인사까지
이 사태가 벌어진 그날, 고검장급 고위 간부 6명에 대해 단행된 자리바꿈도 무엇을 위한 인사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사 요인도 없고 검찰총장 임기 만료를 불과 6개월여 앞둔 시점이라 더욱 그렇다. 새 총장이 임명되면 자연스레 대폭적인 후속 인사가 이뤄지는데도 이번에 서둘러 강행했다. 분위기 쇄신용이라는 게 법무부 설명이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참신성이 떨어지는 회전문 인사를 했는데 조직의 활력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전보가 필요했다면 총장 취임 1년 만에 이뤄진 지난해 7월 검사장급 이상 인사 때 고검장 9명을 전원 유임시키지 말고 이동시켰어야 했다.
총장 리더십에 대한 경고성 인사라느니, 정치 공세에 몰려 있는 현 정권의 주류 인맥(TK·고려대)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느니, 차기 총장 구도를 감안한 경력 관리 차원이라느니, 뒷말이 많은 건 이 때문이다. 이번 인사로 차기 총장 레이스가 시작됐건만 이런 상황에서는 기대를 접는 게 낫겠다. 내년 대선·총선을 앞두고 권력이 검찰 장악을 위한 사전포석으로 인사를 강행했다면 향후 레이스가 충성 경쟁만 요구되는 파워 게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살아 있는 재벌도 무섭지만 살아 있는 권력은 더 무서운 법이니까.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