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형 랩’은 리스크 방임형?… 10개월새 10배 폭증
입력 2011-01-30 18:41
‘A투자자문사 1월 28일자 랩 포트폴리오입니다.’
30일 한 주식투자 관련 인터넷 사이트. 유명 투자자문사의 랩어카운트(Wrap account·맞춤형 종합자산관리서비스) 포트폴리오가 버젓이 올라와 있다. 이 사이트뿐 아니라 다른 금융정보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투자자문사의 포트폴리오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문사의 ‘영업 일급비밀’이 거의 실시간으로 노출돼 있다 보니 개인 투자자의 추종매매를 부르기 십상이다.
랩어카운트 열풍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이 얼마 전 랩 쏠림현상을 막기 위해 개선방안을 내놨지만 증가세가 가파르다. 랩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증권사에서조차 과열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랩 자금 운용규모가 커질수록 리스크 관리가 어려울 거란 이유에서다.
◇폭증하는 자문형 랩, 괜찮나?=요즘 랩 열풍은 자문형 랩이 주도하고 있다. 증권사가 판매하는 랩 상품은 크게 일임형과 자문형 두 가지인데, 증권사가 직접 고객의 일임자산을 운용하는 일임형 보다 투자자문사와 계약을 통해 자문사가 제공하는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일임자산을 운용하는 자문형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자문형 랩 규모는 지난해 3월 6500억원에서 연말에 5조2000억원까지 늘었다. 랩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삼성, 대우, 우리투자증권에 따르면 이달 들어 세 곳 합쳐 총 1조원가량의 신규 자금을 유치했다. 자문형 랩 규모가 불과 10개월 사이에 10배 가까이 폭증한 셈이다.
자문형 랩이 흥행몰이하면서 삼성증권은 올해 목표액으로 7조원, 대우와 우리투자는 각각 10조원을 내걸었다. 랩 영업 확장에 사활을 건 상황을 두고 최근엔 증권사에서조차 과열 우려가 나온다. 랩을 판매 중인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랩에 돈이 몰리니까 고객 유치에 혈안인데, 늘어나는 랩 자금 규모에 맞춰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 든다”고 털어놨다. 한국투자증권 유상호 사장은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랩 증가세가 너무 가팔라 우리는 판매 ‘속도’를 줄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증시 전문가들도 자문형 랩 증가세를 염려하고 있다. 랩 자금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8∼15개에 압축 투자해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랩의 장점이 단점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KTB투자증권 김수영 연구원은 “예컨대 랩 규모가 1000억원일 때는 100억원씩 10개 종목에 투자해 수익률을 올릴 수 있지만 자금규모가 1조원대로 커지면 한 종목에 1000억원씩 투자해야 한다는 얘긴데 시가총액이 그 정도인 종목도 별로 없을뿐더러 대형주에 집중돼 투자종목을 쉽게 사지도, 팔지도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알맹이 빠진 개선방안=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자문형 랩이 급증하자 지난해 9월 개선방안을 내놓은 뒤 업계 의견을 수렴해 이달 중순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준비기간을 이유로 시행시기가 1년 유예되거나 실효성이 떨어져 ‘알맹이가 빠졌다’는 지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수료다. 당초 일임수수료 외에 위탁매매수수료를 따로 받을 수 없도록 했지만 시행시기를 1년 늦췄다. 현재 증권사에서 펀드를 팔면 평균 2%의 수수료 수익이 난다. 하지만 랩은 3%가량의 수수료 수익이 생긴다. 펀드보다 랩을 팔수록 ‘남는 장사’인 셈이다.
금융감독원은 또 투자자문사의 포트폴리오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고 리스크 관리를 위해 자체적으로 포트폴리오 구성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내 영업점에서 랩을 판매하고 있는 한 증권사의 PB(프라이빗 뱅커)는 “자문사 포트폴리오에 따라서 투자하기도 바쁜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백민정 기자 min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