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낭송하다 눈물 “잊히는 게 무서워요”… 시인 허수경, 10년 만에 독자들과 특별한 만남
입력 2011-01-28 17:33
21일 서울 상수동 살롱 드 팩토리, 24일 산울림 소극장, 25일 정독도서관…. 10년 만에 모국을 찾은 허수경(47) 시인이 아주 특별한 만남을 가진 장소들이다.
1992년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공부하기 위해 떠났고 2001년 동서문학상을 받기 위해 잠시 귀국했으니 그의 모국 회귀는 10년 만이다. 2006년 고대근동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도교수인 독일인과 결혼한 그가 모국어에의 갈증을 풀어낸 게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장편 소설 ‘아틀란티스야, 잘가’(문학동네)이다.
21일, 살롱 드 팩토리의 시 낭송회는 대성황이었다. 전 좌석이 꽉 차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을 정도였다. 허수경은 “잊히는 게 무서워요. 잊지 않고 찾아와서 많이 고마워요”라고 인사말을 건넸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평론가가 너무 좋다고 하면 없어 보이는데(웃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시집”이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택수 시인, 김상현 성우가 게스트로 나왔고 허수경은 이날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를 낭송했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몰랐네/저기 공원 뒤편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허수경은 솟구친 격정에 낭독을 미처 마치지 못했고 남은 부분은 손택수 시인이 마저 낭송했다. 참석자들도 이 순간, 눈물을 훔쳤다.
“수도원 너머 병원 너머에 서서/눈물을 훔치다가 떠나버린 기차표를 찢는/외로운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을//나는 몰라서/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지상에 내려놓는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나는 가을 공원을 나오는 것이다”
허수경은 “시를 읽다가 막 우네요.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래요. 이 시집은 제게도 너무 뜻 깊은 시집입니다. 전공 공부를 드디어 끝냈습니다. 앞으로 뭘 할까 갈림길에서 문학으로 온전히 돌아오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독일 생활도 잠깐 공개했다. “내가 하고 있는 근동고고학 공부는 지나간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소멸해 버린 과거 이야기라 공부를 시작했는데 낭만적으로 생각했다가 참 후회 많이 했어요. 지도교수와 결혼도 했어요. 박사논문 심사를 남편이 해야 하는 애매한 상황이 돼서 외부 심사교수를 모시고 심사를 마친 기억이 있어요. 언어가 다른데 사랑 고백을 어떻게 했냐고요? 배가 고프면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빵을 사듯 사랑고백도 그런 것 아니겠어요?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 때 한국이 주빈국이었지요. 그때 요청을 받아 독일에서 한국어로 시낭송을 하게 되었죠. 남편도 함께 와 지켜보았지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 낭독의 ‘∼다’만 기억에 남았나봐요. 집에 돌아와서 내게 묻더군요. ‘다다다다’가 무슨 뜻이냐고. 남편과 함께 나의 시를 독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는데 그때 시를 쓰는 나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을 것 같아요.”
24일,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김경미 함성호 이병률 심보선 김이듬 김경주 시인이 함께 했다. 200여 객석이 꽉 찼고 계단까지 방석을 깔았다. 낭송에 앞서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연주가 분위기를 잡았다. 허수경은 “가수가 노래를 잘하면 목소리에서 헤엄을 치죠. 밴드의 연주를 들으며 그 목소리에 헤엄을 쳤어요”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허수경은 이날도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를 낭송했으나 울지는 않았다. 허수경과 20년 지기인 함성호 시인은 “허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면서 “나는 그걸 이상한 가락, 즉 뽕끼라고 말하는데, 그 뽕끼는 훔쳐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이듬 시인은 허수경의 ‘기차역에 서서’를 낭독했다.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속으로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있던 새끼를 꺼내어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낭송을 마친 김이듬은 “고향 진주에서 허수경은 거의 레전드”라며 “낭송 중 울컥했던 것은 내가 선배(허수경)를 뛰어넘지 못할 것 같아 울분이 받쳤기 때문이다. 마치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르처럼”이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허수경은 25일 정독도서관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끝으로 출간 기념행사를 마쳤다. 주말엔 “아, 고향에는 백석 풍으로 국 끓이는 호박 얼굴을 한 여자가 살고 있을 터이다”(‘고향’)라고 읊은 진주 고향집에 다녀온 뒤 31일 출국할 예정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