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닉에 묻힌 상상력 잭 블랙만 빛났다… ‘걸리버 여행기’
입력 2011-01-28 17:34
조너선 스위프트의 명작 ‘걸리버 여행기’가 3D 영화로 제작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영화팬들은 환호했다. 누가 연출하고 누가 출연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였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가상)현실에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건 현대기술의 이점이다. 그러나 맹신했다간 기술의 늪에 빠지기도 쉽다. 롭 레터맨 감독의 ‘걸리버 여행기’는 눈부신 원작과 눈부신 기술이 범용한 크리에이터를 만났을 때의 결과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뻔한 이야기, 뻔한 결말=소심하고 소극적인 신문사 우편배달원 걸리버가 미모의 여기자를 사랑한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여기자 ‘달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러 갔다가 차마 하지 못하고 달시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들고 나온 것. 그것이 바로 여행기자 지원서였으니, 걸리버는 팔자에도 없던 여행기를 쓰기 위해 버뮤다 삼각지대로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곳에 그냥 ‘발만 담그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웬걸, 뜻밖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천운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소인국 ‘릴리풋’ 왕국이다.
이 왕국은 전형적인 동화책 속의 나라다.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와의 결혼식을 앞둔 아름다운 공주, 공주 하나만을 바라보고 늙어가는 자애로운 왕과 왕비, 정의롭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공주의 약혼자, 이따금씩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이웃나라. 우편배달원 걸리버는 소인국에서 최고의 장군이 되어 뜻밖의 인생을 산다.
우여곡절이야 있었으나, 결말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힘들이지 않고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현실로 돌아온 뒤 걸리버는 괜찮은 직업, 괜찮은 여자친구, 괜찮은 추억을 갖게 된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팬들이 원하는 건 소름끼치는 반전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도 된다. 문제는 새롭지 않은 코미디와 긴박하지 않은 극적 전개가 87분 내내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릴리풋’ 왕국의 현대 문명 패러디=웃음은 의외의 지점에서 터진다. 소인국 릴리풋 왕국에선 다채로운 패러디가 펼쳐진다. 걸리버는 자신의 과거를 거짓으로 지어내며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 등을 인용한다. 릴리풋 왕국의 거리에서는 아이패드 등 신문물을 패러디한 간판들이 여러 개 눈에 띄어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웃음을 준다. 물론, 패러디는 패러디일 뿐 현대 문화나 문명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나 더. 잭 블랙이 ‘최악을 뽑는 아카데미 시상식’ 격인 골든라즈베리 어워드에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이다. ‘걸리버 여행기’에 팬들이 걸었던 기대와 그 자신의 이름값이 반영된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블랙은,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볼 만한 존재다. 릴리풋 왕궁의 화재를 소변으로 끄거나 바지가 벗겨지는 민망한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활약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