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아덴만과 저격능선

입력 2011-01-27 17:51


새해 초 위키리크스는 주한 중국대사관 정무참사관이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에게 ‘북한의 시대착오적 행태가 한국의 역사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명한 외교전문을 공개했다.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한지 100년이 지난 뒤에도 조선은 명의 풍습과 전통을 고수했다”고 지적했다.

명 멸망(1644년) 60년 후인 1704년 조선은 창덕궁 안에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 황제를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같은 해 괴산군 화양동에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졌다. 만절필동(萬折必東), 명이 망했으니 중화문명의 정통과 교화는 황하(黃河)가 수많은 굽이를 돌아 동쪽을 향하듯 조선으로 옮겨졌다는 의미다. 청과의 외교문서는 청 연호를 썼으나 민간의 사기(私記)에는 명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는 게 관례였다.

애국심을 키우는 방식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분과 별개로 조선의 치법(治法)과 정모(政謨)가 송나라와 방불하다고 생각했다. 신하와 문인으로서의 역할 모델을 송나라 문인들에게서 찾았다. 문장과 서화도 송나라의 규모를 본받았다. 닮은 점은 문(文)을 숭상하느라 기풍이 문약해져 이민족의 침략에 번번이 굴욕을 당하는데까지 이른다. 그 과정에서 걸출한 무인이 좌절을 겪는 비극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송에는 간신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옥사한 장군 악비(岳飛)가 있고, 조선에는 혼군(昏君) 선조의 질시를 받은 이순신이 있다. 그러나 당대 역사가 기억되는 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은 악비 사당에 무릎꿇은 진회의 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침을 뱉고 욕을 하도록 했다. 한국에는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군사문화의 유산으로 치워버리고 싶어 갖은 구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순신이 그토록 경멸한 원균을 그의 멘토로 설정한 드라마가 방송을 탔다.

중국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랑랑이 후진타오 주석의 방미 만찬에서 반미(反美) 음악을 연주했다. 1952년 10∼11월 강원도에서 한미연합군과 중공군이 42일 동안 벌인 고지쟁탈전의 ‘승리’를 찬양한 영화 ‘상감령(上甘嶺)’의 주제가 ‘나의 조국(我的祖國)’이다. 우리땅에 있는데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명 상감령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 동북방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사이의 고개 이름이다. 6·25 후반 중부전선에서 수많은 고지전 중 우리 전사(戰史)는 저격능선 전투, 미국 전사는 삼각고지 전투로 부르는 것을 중국은 묶어서 상감령 전역(戰役)이라고 칭했다.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최종적으로 삼각고지를 뺐기지 않았고 국군은 저격능선의 일각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중공군이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에 버틴 이 전투는 전후 중국에서 대승으로 미화되어 영화로 제작됐고 반미애국의 대표 코드가 되었다. 역사를 자기류(自己流)로 고취(鼓吹)하고 정서를 움직이는 국가의 상징조작은 상감령의 피비린내를 알 리 없는 1982년생 랑랑의 가슴과 손을 약동하게 만들었다.

對테러 시대의 神話로

이에 비해 우리는 많은 전승(戰勝)의 기억을 시간의 강물에 흘려버렸다. 6·25 동족상잔의 기억을 꺼리더라도, 조국의 산하를 침범하여 전쟁의 후반을 주도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까지 외면할 이유는 없었다. 6·25를 통틀어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를 비롯해 중부전선 고지쟁탈전의 승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애국의 코드다.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 없더라도 현재의 강물은 음미해야 한다.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하고 상선과 인질을 구출한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테러시대의 자랑스런 승전보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공항 작전과 동급이다. 차분한 스토리 텔링으로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군의 긍지로, 국민의 신뢰로 키워야 한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