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호의 아프리카] 아덴만의 해적
입력 2011-01-27 18:16
소말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누르딘 파라가 쓴 ‘지도’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아스카르라는 이름의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국적과 혈통이 다른 한 여인이 결국 그 아이를 거두어 키운다. 아이는 자라면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잠을 자다가 이부자리에 피오줌을 지리는 일, 즉 월경을 하는 일은 보통이다.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때면 입에 침 대신 피가 고이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소말리아 출신의 이 아이가 이토록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분단의 땅을 딛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말리아는 한때 지부티에서 에티오피아를 거쳐 케냐 북부에 이르는 땅을 호령했다. 인도양과 지중해, 모잠비크 해협에 이르는 바닷길도 훤히 꿰고 있었다. 이런 대제국이 근대 이후 비스마르크의 책상 위에서 갈기갈기 찢겨져 소말리아인들은 영국령, 이탈리아령, 프랑스령, 에티오피아령 소말리아로 뿔뿔이 흩어져 이산의 삶을 살게 됐다.
작금의 소말리아인들이 꾸고 있는 꿈은 소말리 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땅과 바다를 온전히 되찾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분단당한 이후 왜소해져만 가는 소년의 몸통에 늠름한 어른의 근육과 정신을 심는 것이다. 소년의 몸통이 어른의 근육과 정신을 소화하지 못할 때 자기분열을 겪게 되는 일은 필연적 수순이다.
아스카르 또한 자기분열을 피해가지 못한다. 아스카르는 누구보다도 더 마음속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 자신이 어미라 부르며 그림자처럼 따랐던 분신 같은 한 여인, 자신을 입 속의 혀처럼 보호하며 길렀던 한 여인을 ‘구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기에 이른다. 그 여인의 국적이 소말리아인의 철천지 원수인 에티오피아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은 아스카르 같은 인물이 소말리아에서는 예외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이 해적, 산적 따위의 이름으로 벌이는 행위가 ‘구국’ 혹은 ‘애국’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고, 또 집단 내부의 지지를 일정 정도 받고 있다면, 거기에는 집단병리의 수준을 넘어서는 어떤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같은 나라에 사는 흑인과 백인들 중 에이즈에 걸린 흑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그건 집단병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다.” 흑인이 백인보다 윤리적으로 타락해서 에이즈에 쉽게 걸리는 게 아니라 위생조건이나 영양상태 등이 열악해 그 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분명 중뿔난 개인의 낭만적 도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에게서 캐러비안의 해적이 지닌 인간미를 기대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아덴만이 아스카르 같은 인물들이 꾸는 꿈으로 창궐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집단병리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사회가 모르는,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석호 <아프리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