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평양, 낯설지만 그리움이 있는 곳”
입력 2011-01-27 19:07
“오빠들을 평양에 보낸 거 후회하지 않아?” “벌써 가버린 거 할 수 없지. 만일 안 보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는 낡은 선풍기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뒤늦은 후회,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슬픔을 가득 머금은 얼굴에선 두 눈이 잠시 감겼다.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다. 1971년 세 오빠를 북한에 보낸 지 33년 만에 처음 진심을 담은 질문에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저 그가 짓는 표정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는데, 그가 너무 솔직해져버린 것이다. 솔직한 것은 때로 위험한 것이다. 솔직한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는 솔직했다.
그날 밤 그에게 말했다. “내 국적이 좀 복잡해.” “복잡하면 바꾸면 되지.” “한국 국적으로 바꿔도 돼?” “응, 그럼.” “절대 안 된다면서, 갑자기 왜 바뀐 거야?”
평생을 조총련 간부로 산 아버지가, 세 아들을 북한에 보낸 애국적인 가장이 ‘조금의 타협’이란 표현을 쓰며 내게 국적 변경을 허락했다. 내가 마흔살이었던 2004년의 여름밤이었다.
부모님이 계신 일본 오사카를 떠나 다음날 도쿄로 향했다. 그리고 2주일 후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마치 평생 해야 할 말을 꼭 전해야 할 사명감을 지닌 사람처럼, 병에 걸릴 걸 예견한 사람처럼 그는 내게 그토록 솔직한 말을 남기고 병상에 누웠다. 아버지를 만나러 오사카로 돌아갔다.
“아버지, 행복해?” “응.” “아버지와 나는 사상적으로 좀 다르지만.” “안 달라.” “아버지 딸로 태어나 행복했어.”
한쪽 눈은 감겼고, 한쪽 눈은 뜬 채로, 아프지만 않다면 장난치는 듯 그렇게 코믹한 얼굴의 아버지는 숨을 가쁘게 내쉬고 들이쉬기를 반복하며 엉엉 아이마냥 울었다. “아버지, 평양에 가야지.” 그의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날 이후 평양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2009년 11월 83세를 일기로 숨을 멈췄다. 우울증을 앓던 큰오빠가 평양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 지 넉 달 만이었다. 지난 10년 넘게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의 주인공 두 명이 세상과 이별했고, 난 가족의 부재와 결핍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처음 겪는 진통이었다.
조총련 간부인 아버지는 조선 국적, 오빠들은 평양 시민, 나는 한국 국적이다. 누군가는 가족들이 특이해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카메라를 놓지 못하냐고 묻는다. 특이하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재밌어서, 재밌다기보다는 지난 세월 가슴에 숨겨왔던 그리고 차마 못했던 말이 너무 많아서, 그게 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영화로 인해 북한의 오빠들이 억압받지 않을까, 그런 불안과 공포 그리고 영화를 세상에 보여줘야 할 어떤 의무감,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
조총련 간부의 딸인 내가 처음부터 ‘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혁명, 충성 이런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답안지에 썼던 나는 의미도 모른 채 어릴 때부터 수령님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다들 “영희는 참 착하구나”라고 말했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영희는 오빠들을 세 명이나 북한에 보낸 민족적인 집안의 딸이니 대학에 가지 말고 조총련 활동가로 살아야 해.” 많은 것을 누리며 산다고 여겼는데 내게 ‘선택권’이 없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얘기를 한두 시간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데 북한의 오빠들은 어떨까. 그때부터 오빠들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하루도 커피 없인 못 살고, 베토벤과 쇼팽 그리고 비틀스의 음악을 좋아했던 오빠들은 평양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고 있을까….
선생님을 졸라 83년 겨우 진학한 곳은 일본의 대학이 아닌, 도쿄에 있는 조총련의 조선대학교였다. 대학에서도 급우들끼리 서로 비판하는 시간인 ‘총화’가 늘 나를 지적했다. 영희의 책장에 일본·서양 문학 서적이 많다, 정치학습을 소홀히 한다, 외출이 잦다, 극장에 많이 간다고. 풋, 그러고 웃고 싶은데 다들 너무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니까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저 네, 네, 다음에 그러지 않겠습니다, 말하고 또 극장에 다녔다.
대학 졸업하고 87년부터 조총련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하다 2년 만에 그만뒀다. 그리곤 연극 제작자와 배우로 활동했고, 논픽션에 관심을 가져 97년부터 6년간 뉴욕에 머물며 뉴스쿨대학에서 미디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 10여 차례 평양의 오빠들을 만났고, 조카들은 하나 둘 태어나 6명이 됐고, 나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 조국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던 아버지. 그와 논쟁하기 싫어서 함께 식탁에 앉지 않은 채 20대를 보냈다. 30대가 되면서, 카메라를 만지면서 아버지가 참 재밌는 캐릭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인생이 궁금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어졌다.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겪는 차별과 설움에 한국 정부가 관심을 갖지 않던 60, 70년대에 북한은 물자를 지원하며 교포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 건립을 도왔다. 교포들의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고는 일본에서 자립할 수 없었다. 커뮤니티는 갈렸다. 한국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그러면서도 교포들은 함께 살았다. 옆집에 민단 소속 교포가 산다고 이사 갈 수는 없으니까.
사람은 외부의 핍박을 받으면 내부끼린 결속하기 마련이다.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 교포들이 숨 쉬고 살 수 있던 통로, 그게 당시는 조총련 아니었을까. 조국과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것이 조총련에 대한 충성은 아니었을까. 70년대를 지나 북한의 실상을 알면서도 이미 북한에 보낸 아들을 위해 더욱 ‘충성’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부모의 입장은 아니었을까.
“아이들은 수령님의 사랑 안에서 잘살고 있다. 우리 조국도 이제 잘살 것이다”고 말할 때마다 “그 믿음이 너무 오래 되지 않았느냐”고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믿음이란 오래 될수록 좋은 것이다.” 어머니는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손자가 난방이 되지 않는 학교에 다니다 발에 동상 걸렸단 소식을 듣고 겨울마다 손 난로를 박스째 보내고, 비쩍 마른 오빠들의 사진을 차마 아버지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버린 이가 어머니란 걸.
영화를 찍으면서 오히려 이런 가족과의 충돌은 사라졌다. 3년 동안 카메라 앞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아버지가 카메라 앞에서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으면서 북한 정권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술 드시면 늘 노래를 불렀는데, 젊은 시절 아버지는 북한 노래 먼저, 남한 노래를 그 다음에 불렀다. 그런데 내복 차림의 나이 든 아버지는 그저 순수하게 부르고 싶은, 마음의 노래를 시작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여덟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술에 얼큰히 취해 허허, 웃는 얼굴로 부르는 그 노래는 정겹고도 서글펐다. 가슴이 무겁도록 훈장을 주렁주렁 단 모습보다 무릎이 헐렁하게 나온 내복 차림의 아버지가 좋았다. 카메라 앞에서 몇 마디 하다가 “이제 안 해”라며 돌아눕는 아버지의 어깨를 손으로 돌려가며 인터뷰를 더 하려 했다. 그럴 때면 “딸이 시끄러워서 쫓아내야 겠다”며 엄포를 놓던 종이호랑이 아버지. 그 아버지가 지금은 내게 없다.
평양. 그곳은 내게 가늘고 수많은 실이 엉켜서 절대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복잡한 공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체제에서는 낯선 감정이 느껴지지만, 그곳의 가족들은 늘 가슴 시리게 보고 싶은 곳. 익숙함과 이질감, 사랑과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그곳은 타국이면서도 조국이다.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인위적인 냄새를 풍기는 북한 가수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만경봉호(일본과 북한 가족들을 연결하는 선박), 가족들을 기다리는 슬프고도 희망 찬 평양의 눈동자들이 가득한 원산항, 거대한 김일성의 동상 뒤에 보이는 수년째 공사가 중단된 고층 건물, 소박한 시골 풍경이 보이는 버스 안에서 들리는 안내원의 혁명적인 말투.
그래도 가족들은 정겨웠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땐 공산주의자가 됐을지 모르는 오빠를 만나는 게 조심스러웠다. 한 번 방문하면 몇 주씩 머물곤 했는데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눌수록 오빠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오사카 타이거즈 야구팀이 잘하고 있는지, 좋아했던 할리우드 배우들은 어떤 영화를 찍는지가 궁금한 오빠였다. 우리는 밤이 되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평양의 아파트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고, 조카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며 “정말 행복하다”며 감사해 했다.
지금은 북한에 들어갈 수 없다. 3년 전 방문신청을 했더니 어머니는 입국이 되지만, 난 안 된단다. 이제 오빠도 조카들도 볼 수 없다. 허가받지 않고 평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입국금지의 이유라고 그렇게 짐작만 할 뿐이다. 조총련 측은 북한에 사죄문을 쓰라고 했지만 순응하지 않았다.
후속작인 ‘굿바이 평양’의 주인공이자 사랑하는 조카 선화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선화네 가정이 가장 재밌다. 둘째 오빠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아내와 아들 두 명을 낳은 뒤 이혼했고, 두 번째 아내가 선화를 낳았다. 두 번째 아내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세 번째 아내가 아이들을 키운다. 스텝맘인 올케와 아이들은 서로 사랑하며 산다. 나는 이들에게서 가족의 따스함을 느낀다.
조국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묻는다. 조국의 의미가 뭔지, 내 조국이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유는 ‘패스포트(여권)’가 필요해서,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 아버지가 노발대발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한국을 조국이라 하기엔 어색하다. 한국인과 있으면 내가 얼마나 일본인인지 느끼게 된다. 일본이 제일 가깝겠지만, 조국이라기엔 이제껏 받았던 상처와 설움이 너무 많다. 조국이란 내게 한국, 북한, 일본 이 셋일 수도, 또는 이 모두가 아닐 수도, 또는 이 셋의 조금씩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오사카를 고향에 둔 마흔일곱의 영화감독 양영희, 그게 나다.
도쿄=글·사진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