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史 한 시야로 봐야…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입력 2011-01-27 17:26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유용태·박진우·박태균/창비

우리나라의 근대는 언제부터인가. 1863년 고종의 즉위,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도 아니라면 1894∼95년 갑오경장을 들 수 있으리라. 어느 쪽이건, 포스트모던 논의가 무성한 지금 근대의 시작을 찾는 질문은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둘 수는 없다. 근대사에 대한 성찰 없이 미래를 논하는 건 적어도 이 시점의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대 유용태 교수, 숙명여대 박진우 교수, 박태균 역사비평 편집위원이 공동 집필한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창비)는 17세기 이래의 역사를 동아시아사라는 관점에서 폭넓게 조망한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듯 중국 역사를 중심으로 일본 역사 따로, 베트남 역사 따로 서술하던 방식에서도 벗어났다. 기존 국가 중심의 역사 서술 방식으로는 동아시아를 폭풍처럼 휩쓴 근대화·서구화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중국·일본은 물론 류큐(오키나와)와 베트남까지 시야에 넣지 않고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함께 본격화된 근대화의 역사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게 저자들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왜 아편전쟁이 있었던 1842년이나 메이지 유신이 있었던 1868년도 아닌 17세기에서 시작했을까. 현상을 알기 위한 근원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 저자들은 중국은 국가로서 청(淸)이 기반을 잡은 후, 한국에선 왜란·호란이 종결된 뒤, 일본에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뒤 각국의 근대지향이 분명해졌다고 보았다. 국가주도의 쇄국 정책이 당시 동아시아 각국을 규정하는 한 특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사의 발전으로 촉진된 인구 증가와 밀집, 상업의 발전, 서학(西學)의 유입 등으로 인한 사회 변화는 뚜렷했다는 것.

1권에서는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아시아 침략과 각국의 대응 방안이 얽힌 실타래 풀듯 서술된다. 저자들은 근대 초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범동아시아 특유의 외교안보 협력체제인 ‘조공 체제’에서 근대적 외교협상 체제인 ‘조약 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동아시아 대다수 국가들은 내치의 자주권을 토대로 청을 상국으로 받들되 위기상황에서의 협력을 보장받는 전통적 안보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유일하게 이 체제에서 배제된 국가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조공 요청을 명나라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등한 통상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고 조선에 ‘일왕을 천황이라 칭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이를 빌미로 침략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2권에서는 파시즘과 냉전 체제, 신자유주의 체제가 각 나라에 침투해가는 과정이 그려졌다.

19세기 당시 조선의 군주와 식자들이 아편전쟁의 결과와 베트남의 식민지 전락 과정에 대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상세한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대목도 눈에 띈다. 박규수(1807∼1877)는 1874년에 이미 고종에게 베트남 병탄 과정을 보고했고, 김윤식(1835∼1922)은 일본이 조선을 대하는 방식과 프랑스가 베트남을 대하는 방식이 똑같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드높은 파고 앞에 약소국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서양 각국에 차례로 떨어진 뒤에도 독립국가로 한참 존속했던 조선의 식민지화는 한·중·일 삼국이 공통된 역사인식을 형성하는 것을 오래도록 막고 중국 인민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역사, 특히 근대사를 바라보는 작업의 유용성을 인정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전쟁에 대한 향수를 감추지 않는 일본이나 중화주의의 부활이 노골화되는 중국과의 공동 역사작업이 유럽의 경우처럼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일국사(一國史)의 개념은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며 드러내놓고 인권유린을 일삼던 시기는 지났다 하더라도, 티베트와 위구르 및 오키나와의 사례에서 보듯 ‘역내 제국주의’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