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 페사로영화제 충격… ‘부산’의 동력 되다
입력 2011-01-27 18:34
PIFF 15년의 기록 (4)
1991년 11월 8일,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아드리아노 아프라 집행위원장이 영화진흥공사를 찾았습니다. 스위스 바젤에 사는 임안자 여사가 통역 겸 안내로 함께 왔습니다. 조용하고 엄격한 성격의 아프라 위원장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을 집중 연구했던 이탈리아의 대표적 영화 학자입니다. 5주간 서울에 머물며 매일 서너 편씩, 약 100편의 한국영화를 체계적으로 보았고 많은 감독과 평론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6월 제28회 페사로영화제에서 한국영화특별전을 개최했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등 고전영화부터 90년 제작된 이두용(청송으로 가는 길), 박광수(그들도 우리처럼), 정지영(남부군), 장선우(우묵배미의 사랑), 황규덕(꼴지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감독의 최신작까지 모두 30편이 상영됐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족보’(1978), ‘만다라’(1981) 등 9편도 ‘특집’ 형식으로 포함됐습니다. 무려 30편의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상영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93년 10월 20일∼94년 2월 21일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84편이 상영된 것과 함께 유럽에 우리 영화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페사로영화제가 5년 후 부산국제영화제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페사로는 로마 동북쪽, 차로 4시간 거리, 아드리아 해변의 작고 아름다운 중세마을입니다. 음악, 미술, 영화, 그리고 와인이 넘쳐흐르는 ‘예술의 고장’이죠. 세계적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1792∼1868)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80년 이후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은 오페라 가수 지망생은 물론 수준 높은 오페라 공연을 찾는 관객들로 초만원을 이룹니다. 1637년 조성된 600석 ‘로시니극장’은 몇 차례 보수와 명칭 변경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 극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사로에서 불과 45㎞ 떨어진 우루비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건축가이자 화가인 라파엘로(1483∼1520)를 기념하는 문화시설과 작품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입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 탄생한 페사로 영화제는 올해 47회를 맞는 꽤 오래된 영화제입니다. 65년 이탈리아 평론가협회장을 맡았던 리노 마치카가에 의해 창설됐고, 역대 집행위원장은 평론가들이 맡아 왔습니다. 그해 특별전을 갖는 영화들을 중심으로 평론가들이 모여 심층 토론하는 ‘원탁토론(Travola Rotonda)’은 유럽 평단에서 널리 알려진 이 영화제의 대표적 브랜드죠.
92년 여름, 페사로에서 개최된 한국영화특별전에는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감독, 배우 안성기, 그리고 평론가 이효인,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 8명과 영화진흥공사 윤탁 사장이 참가했습니다. 저는 영화진흥공사에서 문화부로 자리를 옮긴 때였습니다. 한국대표단은 ‘원탁토론’에도 참석했습니다. 당시 페사로영화제는 메인 카탈로그 외에 별도로 한국영화에 관한 책자(Il Cinema Sudcoreano)를 발행했는데, 그 집필을 맡은 인연으로 초청돼 페사로에 갔던 이들이 ‘부산의 영화인’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입니다. 이들은 영화제 내용과 운영에 큰 충격과 감명을 받고 부산에 돌아와서 페사로처럼 ‘작지만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를 창설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당시 부산은 ‘영화운동’이 점차 불붙고 있었습니다. 85년 이용관 교수가 경성대 영화과에 부임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젊은이들이 외국영화, 특히 고전영화에 목말라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은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해방구’였죠. 서울의 젊은 영화학도들은 두 문화원에서 함께 영화 보고, 토론하면서 혹은 영화감독으로, 또는 영화평론가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도 경성대 앞에 있는 프랑스문화원이 그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부산예술문화대학 김지석 교수는 오석근 감독과 함께 프랑스문화원에 ‘시네클럽’을 창설해 이끌고 있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이용관 교수는 서울에서 전양준, 이충직, 이효인, 신강호 등을 경성대 강사로 끌어 왔습니다. 전양준은 서울에서 잡지 ‘영화언어’를 창간해 발행하다 아예 부산에서 발행하기 시작했죠.
이렇게 해서 부산의 프랑스문화원은 서울과 부산에 있는 영화과 교수, 영화학도들이 수시로 모이는 장소가 됐고, 부산에서 영화운동을 점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페사로에서 돌아온 김지석은 이들과 수시로 모여 영화제 창설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때마침 부산시는 2002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해 놓고 이를 국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아시아 10개국 14개 도시의 민속공연과 특산물전시를 중심으로 ‘아시아 위크’ 행사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부산평론가협회는 94년 11월 21일, ‘2002년 아시안게임을 대비한 부산영상문화 진흥방안’ 세미나를 부산일보 소강당에서 개최했습니다. 세미나에서 김지석 교수는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가능성과 의의’에 대해, 허창(작고)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은 ‘부산의 영상문화와 영화제작의 가능성’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고, 안수근, 오석근, 이용관, 이정하 교수가 토론에 참가했습니다. 드디어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문제가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95년에 접어들면서 김지석 교수는 공연기획사 ‘열린판’의 김유경 사장으로부터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국제영화제에 관심이 많고, 5억원 지원이 가능하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시도가 본격화되고,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영화제를 만들고 이끌어 갈 집행위원장으로 제가 거론된 것이죠. 95년 8월 18일 10시,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김유경과 제가 만난 ‘프라자회동’은 이렇게 이뤄졌고, 이들에게 국제영화제에 대한 열망을 갖게 만든 곳은 바로 1992년 여름에 개최된 페사로영화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