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유정복 장관의 블랙코미디
입력 2011-01-26 17:37
경기 화성시 마도면 또나따목장에는 젖 짜는 시간을 스스로 정하는 젖소들이 있다. 300마리쯤 되는 녀석들은 하루 종일 널따란 축사를 한가롭게 거닐며 배합사료와 건초를 먹는다. 그러다 유방에 젖이 차올라 불편해지면 축사 한쪽의 자동로봇착유기로 다가가 몸을 맡긴다. 착유로봇은 유방을 세척하고 레이저로 젖소 상태를 체크한 다음 유방 4개에서 그날의 유두 상태에 따라 강도를 조절해 가며 젖을 짠다. 젖소의 최대 스트레스인 젖 짜는 과정을 편안하게 해준 것이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모래틈농장은 돼지를 위한 ‘분만클리닉’을 갖췄다. 임신한 어미는 출산 1주일 전부터 농장주 권명순씨가 개발한 ‘프리덤 분만틀’로 간다. 다른 놈들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새끼를 낳도록 고안된 독립 공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운동도 할 만큼 널찍하다. 높은 칸막이로 분리돼 갓 태어난 새끼들에게 안심하고 젖을 물릴 수 있다. 이곳 돼지들은 쾌적한 환경 덕에 소모성 질병 폐사율이 일반 농장의 8분의 1 수준인 3∼5%에 불과하다.
두 농장은 농림수산식품부가 지난해 9월 펴낸 ‘행복한 동물농장 함께 웃다’란 책에 소개된 곳들이다. ‘농장동물복지 우수사례집’이란 부제가 붙은 책은 국내에 드문 동물복지형 농장 8곳의 사육방식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유정복 농식품부 장관은 책 서두에 실린 발간사에서 축산농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배고프던 시절, 농업은 많이 생산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품질 좋고 안전한 농산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동물복지는 생소하지만 중요한 요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해야 하는 세계 각국은 이미 동물복지형 축산물 기준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고, 우리도 준비 중입니다… 이 여덟 농가의 생각과 경험에서 미래가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좀 쉽게 풀어보면 이런 얘기다. “이 책에 소개된 여덟 농가를 보십시오. 소 돼지의 복지를 챙겨주며 기르니 모두 고품질의 안전한 축산물이 나오고 생산성도 높아서 수익이 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이제 선진국 축산농민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동물복지형 축산을 하고 있고, 우리 농식품부도 그 기준을 마련 중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동물복지에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선진국 진입을 노리는 나라의 농식품부 장관으로서 당연히 할 만한 이 ‘선진적인’ 얘기가 지금은 블랙코미디처럼 들린다. 한국이 배고프던 시절, 정부가 가장 먼저 추진한 복지정책은 건강보험이다.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는 건강보험은 복지 중에도 가장 기본적인 복지다. 이건 회사 사장이나 시장 군수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 가난했던 정부도 없는 살림 쪼개 건강보험부터 챙겼다.
가축에게 방역은 건강보험 같은 것이다. 쾌적한 축사와 스트레스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호흡기나 생식기의 세균성 질병은 크게 줄일 수 있지만,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같은 바이러스의 침투까지 다 막지는 못한다. 바이러스로부터 가축을 보호해 주는 건 철저한 방역시스템뿐이고, 그래서 수의학자들은 방역이 가장 기본적인 동물복지이며 정부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말한다.
이번 구제역 사태는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경북 안동에서 처음 의심증상이 신고됐을 때 ‘음성’으로 오진해 1주일이나 손놓고 있었던 게 최대 실패였고, 그 원인은 구제역 정밀검사 장비가 전국에 단 한 곳, 국립수의과학검역원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허술한 공항 방역과 숱한 뒷북 조치는 농식품부가 방역시스템을 얼마나 소홀히 대했는지 짐작케 한다.
유 장관의 ‘행복한 동물농장 함께 웃다’ 발간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이건, 건강보험 정책에 실패한 복지부 장관이 무상급식과 무상교육을 역설하는 꼴이다.
태원준 특집기획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