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황·청·흑·백 ‘담양 오방길’ 걸어보니… 한 폭 수묵화가 따로없네

입력 2011-01-26 17:31


걷는 길에도 품격이 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소복소복 쌓인 이른 아침의 대숲길. 참새 발자국 선명한 순백의 길이 너무 호젓해 차마 발걸음 떼기가 망설여지는 구불구불한 돌담길. 그리고 찬란한 아침햇살에 밤새 피운 눈꽃이 이슬처럼 스러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다섯 개의 명품길로 이루어진 ‘담양오방길’의 아침 설경은 한 편의 시이자 한 폭의 수묵화이다.

가사문학의 산실이자 죽향골로 이름난 전남 담양에서도 소쇄원, 지실마을, 한국가사문학관, 식영정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 누정길’은 자연과 문학이 하나 되는 선비의 길. 송강 정철(1536∼1593)의 고향이기도 한 지실마을은 방 얻으러 갔던 나희덕 시인을 애타게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 시인은 ‘방을 얻다’라는 시에서 고택의 빈방을 세놓으라는 제의에 주인아주머니가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맘으로는 늘 안채를 쓰고 있다”고 답하자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는 이미 그 방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허물어진 돌담과 사철 푸른 대숲은 지실마을의 아이콘. 청량한 바람소리를 머금은 대숲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누렇게 탈색한 돌담의 이끼는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두껍다. 좁은 골목길을 걷다 만나는 노인에게서 송강 정철을 떠올리는 것은 지실마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명옥헌 원림에 뿌리를 내린 배롱나무와 식영정의 노송은 누정길을 상징하는 나무. 송강 정철이 머물던 곳으로 ‘성산별곡’의 탄생지인 식영정은 광주호 옆 야트막한 야산의 노송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식영정은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뜻. 광주호의 얼음 깨지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식영정 돌계단을 오른다.

조선시대 별서정원의 대명사로 꼽히는 소쇄원의 겨울은 사뭇 시적이다.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입구부터 50m 길이의 대숲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어둑어둑한 대나무 터널에 들어서는 순간 댓잎에 핀 눈꽃이 참새 날갯짓에 놀라 후드득 낙화한다.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1503∼1557) 선생이 500년 후의 겨울손님을 위해 마련한 퍼포먼스다.

소쇄원 설경의 하이라이트는 제월당과 광풍각.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은 서재로 주인의 성품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풍류가 스며있다.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광풍각(光風閣)은 주인이 소쇄원을 찾은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공간. 누마루에 앉으면 얼음 속을 흐르는 계류가 글 읽는 선비의 목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린다.

슬로시티로 유명한 창평면의 삼지천마을은 ‘사목사목 돌담길’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을 얻었다. 문화재로 등록된 3.6㎞ 길이의 옛 돌담길은 돌과 논흙으로 만든 토석담. 고즈넉한 돌담 사이로 시간도 쉬어가는 마을 안길을 걷다보면 절로 느림의 미학을 체감하게 된다. 대대로 느림과 비움의 삶을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을 담그고 쌀엿을 고아 슬로푸드의 맥을 잇는다.

대부분의 전통마을 골목길은 직선이거나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삼지천마을의 골목길은 물결치는 파도처럼 연쇄적으로 S자를 그린다. 액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복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고재선 가옥, 고재환 가옥, 고정주 고택 등 남도의 멋과 풍류가 스며있는 고택을 기웃거리면 조선시대의 선비를 만날 것만 같다.

성인산 자락에 조성된 죽녹원에서 관방제림을 거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멋스런 구간은 ‘명품숲 가로수길’로 유명하다. 대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이온과 푸른 기운이 송강 정철의 시구처럼 생생한 죽녹원은 한겨울에도 초록빛이 완연하다. 대나무 마디에 눈이 쌓인 풍경은 영락없는 수묵화.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어찌 그리 곧고 속은 어이 비었는가/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고 대나무를 칭송했다. 오우가의 칭송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겨울의 대밭에서는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한 대나무가 폭탄 터지듯 꽝꽝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차라리 갈라져 죽을지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대나무의 곧은 심성이 담양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고나 할까.

1970년대에 식재된 메타세쿼이아는 담양을 대표하는 명품 가로수. 나뭇잎에서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여름 풍경도 아름답지만 앙상한 가지에 하얀 눈이 쌓이는 겨울의 메타세쿼이아에서는 선비의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난다. 드라마 ‘여름향기’와 영화 ‘화려한 휴가’ 촬영지로도 유명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2006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로 선정됐다.

전국 최초의 하천습지에 조성된 ‘담양습지 둑방길’이 강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담양호 산성길’은 호수변의 가파른 산을 오르는 고행의 길이다. 담양호에 발을 담근 산성산(603m)의 봉우리를 따라 등고선을 그리는 금성산성은 남성미와 여성미가 혼재된 산성.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7345m 길이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금성산성의 출입문은 남문으로 새의 부리처럼 튀어나온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장성 입암산성, 무주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는 금성산성은 천혜의 요새. 노적봉 철마봉 운대봉 등 암벽으로 이뤄진 경사면에 돌을 쌓아 유려한 곡선의 성곽을 만들었다. 정유재란 때는 2000명의 군사가 숨지고, 산성에서 배수진을 친 동학군은 압도적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되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남문인 충용문에서 노적봉과 철마봉을 거쳐 서문에서 보국사터를 거쳐 다시 충용문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는 겨울 트레킹 코스로 이름났다. 노적봉의 천년송 앞에 서면 담양호와 추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멀리 무등산과 지리산의 윤곽도 선명하다.

담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