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다섯… 예수 믿고 낳은 아들 목사 됐지”
조귀란(78) 할머니는 6·25전쟁이 나던 해 경북 예천 지보면 안동김씨 마을로 시집왔다. 혼인하고 넉 달 만에 남편은 군에 징집됐고, 5년을 헤어져 살았다.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한 남편은 참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다. 위로 동서가 셋인 조 할머니는 시댁 식구 열다섯 명의 밥상을 책임져야 했다. 곤고한 삶 속에서 예수 믿기를 미루고 미뤄오던 조 할머니. 그러다 셋째 딸이 소아마비에 걸려 긴 투병을 하게 되고 다섯째가 되도록 아들 소식이 없자 무작정 십자가에 매달려보기로 작정했던 할머니다. 예수 믿고 낳은 아들은 이제 서울 한 교회의 목사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 “받는 목사 되지 말고 주는 목사 되라.” 아들에게 하는 당부다.
귀한 딸 시집 가 고생
(눈이) 많이 왔어요. 다 쳐내야 하는 데 다 못 쳐냈잖아요. 구제역 해지 되았어요. 보름 전엔 못 들어왔어요. 혼자 있으링께롱 뭐 저질<어지를> 것도 없잖아. 추와요. 지름 한 달에 한 다오<통> 때요. 한 다오 20만원. 추우니께로. 20년 못 살았지. 지은 이가 날림집으로 돈을 띠어가 먹어. 아유 이거 추와 가지고 자꾸 얼고.
나요. 7남매 낳았지요. 그래서 하나님한테 감사하지요. 참 가난하게 살았는데 잘 컸어 모다<모두가>. 내 친정은 포양면 공덕(풍양면 공덕리)이래요. 3남매요. 3남매메 딸 하나고 오빠 둘이고. 내사 막내.
우리 부모님들은 엄하고, 삼형제뿐이고 그래 클 때는 모 조산없이(귀하게) 컸지요. 우리 고모가 중신을 여기다 해줬으요. 그래 가지고 고모가 여 아무것도 없는 오야지로<좌우간에> 암 것도 없더라고요. 우리 고모가 시숙모를 만났어요. 우리 시숙모가 “중신하나 해주소” 그러는데 “우리 질녀가 있는데요.” 밥을 얻어 잡숴가 그 정을 못 떼가 이리 됐어요.
육이오 전쟁에 남편과 생이별
농사짓지요. 시골 촌엔데요 뭐. 예수 안 믿었어요. 나는 안 믿고 이 집에 와서롬. 제사는 큰집에 있으니께롬. 힘든 일 안했지요 거기서는(친정서는).
열 일곱 살에 왔어요. 육이오 사변 때. 여기 와 가지고 넉 달 만에 (남편이) 군에 갔어요. 여 장로님(남편)이 2월 달에 와가지고 6월 달에. 오년 차이래요. 스물 두 살에 장개가고 열 일곱살에 들어왔어요. 좋은 걸 뭐 알아요 난 어린디요. 군에 가벌고 오년 만에 왔던데요. 군에 가서 마 부상당하고. 큰 딸은 군에 갔다 와가지고 낳았어요. 큰 집 한 데<한 곳에서> 살았지요. 시동생이 한 열 시살 났고요. 조카들도 있고. 시어머니 시아버님 계시고. 큰 집에 사느라 고생 많이 했지요. 동서가 삼 동서가 있어. 열 다섯 식구가 살았어요. 한 집에 전장이 났으니까 다 모였지요. 열 다섯 식구가 살아가지고 하루 물을 열 다섯 번을 여도<길어도> 안돼요.
육이오 사변 나가지고 그때 한 집에 살았는데요 숭년<흉년>이 졌어요. 난리가 나가지고 숭년이 거덕 거덕<풀이 마른 모양> 져가지고 꺼뻐리<곡식 껍질>를 빻아가지고 열 다섯 식구가 먹잖어. 나이 어린게 조일<종일> 해야 해요. 밥도 못하고 죽을 꿇어 먹고. 다리 다 안 붓데 나만 붓더라고요. 먹어도 맹 어지러워가지고 물을 여러<이러> 가면 쓰러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까지도 머리가 아파요.
피란은 (남자들만) 저게 저저 청도라는 데 갔다가 다시 왔어요.
아이유 어스꾸와<무슨 소리에요> 여러 동서니께 마이 했지요. 일년에 콩 잎을 한 삼십통을 삶아 먹었어요. 이마쿠<이만큼> 이 짱<장>에 가 사서. 없으니께롱. 그때가 보릿고개지. 아이고 밥해먹고 (국수를) 밀고 명<목숨> 잡고 그래 살았지요.
남편은 참전용사
5년 동안 그렇게 살다가 장로님이 군에 갔다 오고는 그런 고생 안했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안 가지고 나갔으니께롱. 소식은 들었지만은 그때 한 삼년 만에 왔더라고 처음으로. 뭐 나이 어리니께 만나도 둥둥<덤덤>하고 그랬지요. 그때는 어른들이 있어가지고 서로 잘 대하지도 못했어요. 그래 왔다가 휴가 맡아 가지고 왔지요. 2년 더 있다가 제대했어요.
저 삼팔선 밑에 거기서럼 한 등거리<덩어리> 뺏어가지고 훈장 탔데. 여 살아온다는 건 생각도 안했어요. 안 오시면 그냥 살다가 뭐. 걱정은 되지요. 아이고 시어머님이 내<계속> 그랬어요. 그때도 숭년이라 가지고 그것도 모르고. 살아오니께롱 우리 동서가 젤 좋아했어요. 시동서만 믿고 살았거든요.
예수 믿고 낳은 아들 목사되어
아들을 못 낳아서 예수 믿고 낳았는데. 딸을 다섯을 낳고 아들을 낳았어요. 참 천하를 얻은 거 같지요. 말도 한 번 안 일구고 그렇게 잘 컸어요. 목사님이 된다 그리께로 좀 힘도 들더라고요. 아들 하난데. 목사님 되먼 또 어럽게 잘해야되지 못하면 안되잖니꾜. 그래서 받는 목사가 되면 안되고 주는 목사가 될꼬 기도 많이 했지요. 남한테 사랑받고 사라꼬. 하나님 덕이죠 뭐.
우리 아들 목사된 기요. 원하지도 안해고 국민학교 때 저 둘째 큰 엄마가 물으니께로 목사한다 해요. 큰 엄마가 목사한다고 막 뭐라 했다 그래요. 국민학교 때부터 목사한다 했어요. 서울에 놀러(‘엑스플로74’ 보러) 가지고 그래됐지. 안 그랬어요. 그건 아이래요. 목사아들 되는 건 안 배랬는데. 지대로 갔죠.
(신학대) 졸업식때 갔어요. 눈물 나더라고요. 용돈도 지대로 못 주고. 고생스럽게 공부했잖니꾜. 딸은 한 사람만 식이고 국민학교 식이고 못 시켰지요. 공부도 생각 못하고 빙만 고친다고 농사 짓는대로 다 들이가니께로.
똑같이 줬고 더 주고 뭐 그런 건 없어요. 그래고 키와 놓으면 버릇 없잖습꾜. 오냐오냐 키우젠 않았어요.
새벽기도 마치고 소죽 끓이는 남편
(남편이) 오셔도 아무 것도 없으니께롱 벌어가지 사려고 마이 힘들었지요.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나왔지요. 5년을 군에서 나와서 시숙이 나가라하니께로 나갔지요. 사장없이 고생했지요.
믿음 좋지요. 예수 믿고 고만에 술 담배 다 끊어버렸어요. 군에 가서 믿었데요. 어릴 때는 다녔다가 안 다녔다가 슀다가 군대가셔서. 참호 속에서 찬송했데요. 그 뭔 찬송이여. 고요한 바다. 군에 가서 만날 그것만 불렀다 그러잖아.
교회 사람들한테 존경 마이 받았으요. 가자 그래도 내가 안 갔지요. 사느라고 힘들고 어렵고 하니께로.
장로님은 교회 댕기는께롱. 뭐라도 열심히 하니께롱. 우리 시어른이 만날 살아계실 때 갯집<누추한 집>에서 부른 이름은 순용(순하다는 뜻에서)이래요. 집에서 부르는 건. “내가 순용이 오면 순용이하고 살고 다른 이 하곤 안 산다” 그랬는데 돌아가셨잖아요. 군에 다녀오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장로님은 동네서도 칭찬 받았어요. 열심히 하고 말이 없고. 돈이 많이 벌어가지고 땅도 많이 사놨어요. 농사 지어가지고 애껴 쓰고 애껴 먹고 해서. 송아지 하나 팔면 아들 등록금 주고. 농사 지어가지고 품도 팔고 이래가지고 한 푼 주고 그랬지요.
다른 아낙들을 다 물을 길는데. 장로님은 새벽기도 마치면 아서롬<와서는> 소주끼려 놓고요 볶<부엌>에 제치고 물 줘다가 물 데놓고 그랬어요. 매일 같이 그리 소주 끼려놓고 해줘요. 일은 똑같이 했지요. 밭에 나서서 일은 똑같이 했어요.
엄했지요. 좀 무사와요. 때리지는 않애도. 야<아들> 하나는 꾸지람도 한 번 안 들었어요. 지가 잘하니께롬. 친구간에도 싸우는 일도 없었고 착하게 잘 컸어요. 가정예배는 저그한 때는 못하고 늦게 인자 했지. 그때가 언제가. 아들 다 보내놓고 둘이 있을 때. 둘이 성경보고 뭐. 또 들에 가서 바쁠 땐 못하고. 농사일은 내가 장로님 돌아가시고 나고 장로님이 십년을 일을 못하다 돌아가셨어요. 혼자 한 십년 했지요.
아픈 딸 살리려 기도
장로님은 딸한테 눈치지바<눈치주는>는 소리 안했어요. 아들 혼자라고 더 잘해주고 그런 것도 없어요. 사실 못 낳는 줄 알았지요. 그래 예수 믿고 아들 낳았는데, 그 전에는 안 믿는데(친정)서 왔으니께네 믿음 잘 안되더라고요.
그때는 뭐 아들 하나 놓으려고 점도 하러 가고 그랬어요. 한데도 못 낳는다 하더라고요. 아들 없다 그러요. 아휴 포기해 버렸으맹? 끝까지 바라고 예수 믿고 낳아버렸지요.
교회는 딸 때문에 나갔지요. 다 건강하게 자랐는데 딸 하나가 한 너이 날 때 아팠어요. 아홉 살까지 병원 대니고 그랬어요. 지금 그 딸이 오십 둘이래요. 46년인가 그렇지요. 그때는 가를 스물 세살인가에 낳았는데. 다리 여개가 아파가지고(소아마비) 고생했어요. 온 천연<동네> 엎고 댕기면서. 나아가지고 지금 서울 가서 살아요. 언나요? 아들 둘 나았는데요. 못 고친다고 그래가 다릴 끊으라 그러더라고요. 근데 대구 가서 곤쳤어요. 그래 딸도 아프고 아들도 없고 해서 교횔 나갔지요.
갈동교회 조귀란 권사
갈동교회에요. 강대호 목사님이라고 아 좋죠. 훌륭한 목사님이었어요. 그 목사님이 저기 여기서러 돌아가셨어요. 노회장까지 했어요. 그 때는 (성도가) 많앴지요. 사람 마이 죽고 남아나덜 않아서.
교회서는 이 식당도 없어가지고 한 10년은 우리 집에서 밥해주고. 우리가 밥하고. 전에는 당 장로님댁에서 하다가 그 집엔 연세가 많아가 우리 집에서 하다가. 제일 김원철 장로라고 그 분이 내 시집오기 전에 장로하셨고 그 다음에 당 장로님 하셨고 그 다음이 우리 장로님.
권사된 지가 한 십년 넘었응께롱. 진작 했을 긴데 동서 남기고 권사 안 되지요. 시숙 남기고 장로됐는데. 장로님이 먼저 시키지 말라고 선포를 해버렸어요. 장로님은 사십 구살에. 일찍 됐지요. 교회일을 맨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요. 장로 되고는 다 우리 집에서 했지요. 여 박목사님이 그때는 사모님이 손님을 못 쳐요. 우에드간에<어쨌든 간에> 안 치더라고. 손님 다 쳤어요<치렀어요>. 노회장 되니께 손님 월매나 옵니껴. 잘하지는 못해도 여럿이 하지요. 교회서 뭐 할 때는 여럿이서 하고, 목사님 손님 와서 해줄 때는 뭐 되는 대로.
10년 투병한 남편
장로님이 저기 사가<사과농사>를 했어요. 저 싣고 가다가 경운기 넘어졌어요. 경운기 때문인가 그래 봤더니 폐가 다 망가졌더라고요. 힘든 일을 못하더라고요. 전염이 되지 않았딥교. 시숙이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나니께로. 시숙 돌아가는 거 다 봤지요. 사람이 죽을 때는 또 다 나온다데. 너무 고만이 아파서 경운기 때문에 아픈지 알았는데. 그걸 일찍 발견을 못해가지고. 다 나앗는데도 한 십년 일은 못했지요. 돌아가실 때 에미레이
어려울 때 같이 사는 게 이웃
이웃에 없이 사는 사람 쌀도 좀 줬고 고구마 캔 것도 좀 줬고. 봉안 장로님 그때 살 지금 몇 가마니나 된다꼬. 그때는 그 집보다 나았으니께롱 없는 사람 생각하고 줬죠. 주도 안했어요. 마이 안 줬어요. 아유 가만히 갖다 주지요. 그 집에는 그리 내러 가져가는 거 본인들은 알지요. 본인들이 집에 있으니께 가니께로 알지요. 나는 잊어 뿌리는 데 봉안 장로님이 그때 그 집에서롬 그래 고맙다고. 그 때 아들들을 국수를 삶아가지고 때를 이으고<끼니를 잇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쌀을 삶아가지고 없을 때. 우리도 없이 고구마나 캐난 그거 좀 주고 그랬지. 안 그랬어예. 요만큼이 아니고 한 자루씩 갖다 주세요. 안 으요. 부흥회 여서 하면 집집마다 밥해줬는데요 뭘. 돌아가며 밥해줬어요. 동서하고 밥도 같이 해주고.
맹 권사라고 그 분이 제일 많이 했지요.
장로님이 어렵게 살아도 목사님 공부하는 데 등록금도 대주고. 아이구 어렵지. 힘이 들지요. 힘들고 그래 주만 주고 나면 끝나지요.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고. 옷도 해 입이고. 오만 차비도 대주고.
■ 연보
1933년 예천군 풍양면 공덕리에서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남
1950년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에서 김현동(당시 22세)씨와 혼인
1950년 남편 징병 6·25 참전 5년간 복무
1955년 장녀 숙희 출생
1956년 차녀 경숙 출생
1958년 3녀 경희 출생
1960년 4녀 영애 출생
1961년 5녀 애희 출생
1963년 장남 휘현 출생(서울 면목동 동일교회 목사)
1965년 6녀 태숙 출생
2000∼20004년 갈동교회 권사
2008년 남편 김현동 장로 작고
■ 갈동교회는
갈동교회는 올해로 90주년을 맞이한 뿌리 깊은 교회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상락교회(1906년 설립)에 전도 받은 어신리 마을 사람들이 개척한 교회. 일제 시대 때 인근 7개 교회가 이 교회로 통폐합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소속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현재 담임목사는 손태웅 목사가 맡고 있으며 출석 성도 수는 40여명이다. 고령화로 성도의 평균 연령은 70대다. 농촌 교회지만 해외 선교를 꾸준히 해 왔다. 인도 선교사 1명과 중국 옌볜과기대 교수 1명에게 매달 30만원씩을 후원하고 있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교회로도 알려져 있다. 갈동교회 출신 목회자수는 15명이다.
예천=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