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침묵을 위하여

입력 2011-01-25 18:22


지난 12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애리조나 총기사건 희생자 추모식에서 한 연설이 화제다. 그는 희생된 어린 소녀를 이야기하던 중,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분이 다 되도록 침묵하고 있다가 연설을 이어 나갔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 대통령이 전 국민과 감정적 소통을 했다면서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거라고 보도했다.

콘서트에 가보면 말 잘하는 가수보다 오히려 말이 서투른 사람들의 인터뷰에 관심이 가고 마음이 다가가게 된다. 한번은 어느 가수가 청중을 향해 “여러분들은 환갑이 넘으면 어떤 일을 하실래요?”하고 물었다. 객석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저마다 환갑 이후의 모습을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 시간은 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그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의 생각들이 접점을 찾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꿀까 해요.” “제주도에 집을 지은 뒤 친구들하고 살고 싶은데요.” 손든 사람의 말을 하나하나 다 듣고서 그가 말했다. “저는… 환갑이 되면… 연애를… 시작하려고요.” 더듬거리는 그의 말에 폭소가 한 차례 흔들고 지나갔다. 그가 던져 준 무언의 시간은 침묵이 아닌, 청중들과 영혼이 교류하는 시간이었다.

이를 닦을 때마다 피가 나고 들뜨는 기분이 들어 치과에 들렀다. 의사는 잇몸치료를 해야 된다며 첫 단계로 사랑니를 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뺀 자리에 거즈 뭉치를 메워주며 네다섯 시간 정도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했다. 사람들에겐 손짓과 메모지를 사용하고 표정으로 내 생각을 전했다. 그들은 용케도 내 손짓을 알아 맞혔다. 고요 속에 남겨진 나는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이 없어도 될만한, 진실을 가리는 가리개가 아닐까 싶었다.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가면 가끔 행위예술을 접하게 된다. 한번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옷을 모두 벗고 사람들 사이로 뛰어나왔다. 사람들의 당황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렸다. 죄로 물든 세상을 묶는 대신, 자신을 옭아맨다는 퍼포먼스였다. 알몸이 되어 겹옷 속에 갇힌 모든 인간의 죄악을 표현하고 있었다.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 없는 움직임이 우리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의사는 당분간 자극성 음식이나 술, 목욕을 삼가라고 했다. 정상적이고 생명력 있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폭언도, 유혹도, 원색적 언어도 위반이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혹시 아프면 약을 복용하라고 했다. 통증에는 조제된 진통제라도 있지만 허투루 쏟아낸 말을 다스릴 처방전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오바마 대통령은 침묵의 연설로 자국민의 아픈 마음을 다독이고, 간극이 있었던 정치의 골도 메워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침묵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 올 때 나는 내 목소리에 얼마만한 공명(共鳴)을 담아낼 수 있을까. 거즈 뭉치를 뽑아내고, 잇몸이 제자리를 잡으면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옹알이를 시작하는 어린애처럼. 그리하여 다시 건배하고 싶다. 침묵을 위하여!

조미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