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식량난에 AI파동까지… 한반도 찾아온 겨울 철새의 수난

입력 2011-01-25 17:26


“즐겨 찾는 곳이 공사 중이거나 강물이 얼어 내려앉을 곳이 없어요.” 올해 한반도를 찾은 겨울 철새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십수년만의 혹한, 쉼터와 먹이부족, 조류인플루엔자(AI) 파동 등 3중고를 겪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이 지난 주말 실시한 철새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겨울철새는 예년보다 일찍 한반도 남쪽으로 피한했다. 비교적 따뜻한 전남 해남·영암 일대 호수에 40만마리가 자리 잡았고, 일부는 낙동강하구에 몰렸다가 12월 중순 이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떠났다. 철새센서스 시행 책임자인 생물자원관의 척추동물연구과 김진한 박사와 금강하구, 동림저수지, 새만금 일대를 다녀왔다.

“나는 가창오리입니다. 새벽 동이 틀 때나 석양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들의 군무를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우리는 낮에 강이나 습지에 앉아 쉬다가 밤에 근처 논에서 나락을 주워 먹습니다. 11월 초에는 천수만 간척지에 머물면서 나락을 먹는데 올해는 풍해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더군요. 일찌감치 천수만을 떠나 금강하구와 장항습지를 거쳐 전북 고창 동림저수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12월 하순부터 너무 추워 강물이 얼어버렸습니다. 이제 전남 해남 고천암호와 영암 영암호까지 내려 왔습니다.”

◇금강도 다 얼었다=김 박사는 지난 22일 금강하굿둑 도로 위에서 “금강하구가 통째로 언 것은 2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국 철새도래지에서 철새센서스에 참여하는 조사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전북 고창 동림호는 얼었나요? 내일 아침까지 상황을 알려 줄 수 있나요?”

하굿둑 바깥 바다에는 기러기류가 더러 헤엄치고 있었지만 제방 상류는 완전히 얼음덩어리였다. 강 북과 강남의 탐조전망대는 구제역 때문에 모두 휴장 중이었다. 빙판 위 먼 곳에 큰고니 세 마리와 괭이갈매기, 혹부리오리, 청둥오리 수십마리만 보였다.

김 박사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충남 부여 웅포대교 밑 얼지 않은 강가에 가창오리 2000여마리가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가보니 새들은 이미 옮겨가고 없다. 김 박사의 고민이 커졌다. 특정 지점에서 예년에 보이던 철새 종들이 관찰이 안 되거나, 적게 돌아오면 개발사업의 빌미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철새 숫자가 안 나오면 2월말에 다시 조사해야겠다”고 말했다.

◇철새의 식량난=겨울 철새 가운데 많은 종이 논에 떨어진 나락을 먹고 산다. 올해 무논은 물론 눈 덮인 논이 얼어 철새가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과거 수입사료가 상대적으로 쌀 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볏짚도 이젠 귀해졌다. 볏짚을 사료로 팔기위해 돌돌 말아 비닐로 싸 버린다. 김 박사는 “철새의 먹이가 준 것은 AI 발병과 확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먹을 게 없어진 야생조류가 민가의 가금류와 접촉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가와의 계약재배를 지원하는 생물다양성관리계약 예산도 지난해 66억원에서 올해 33억원으로 반토막났다. 이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농가에 철새를 위한 보리농사를 짓도록 하고 지원금을 주는 제도다. 구제역 방역을 위해 각종 행사가 금지되면서 야생조류 먹이주기도 거의 중단됐다.

23일 아침 전북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동림저수지를 찾았다. 하지만 이곳마저 얼어붙었다. 다행히 호수 한 가운데 넓지는 않지만 얼지 않은 곳이 있었다. 이미 도착한 철새 조사단의 진선덕 연구원이 필드스코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국립중앙과학관 자연사연구실에서 일하는 진 연구원은 철새가 6000여마리에 이른다고 했다.

가창오리가 2500여마리로 가장 많았다. 홍머리오리, 흰뺨검둥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큰고니, 큰기러기, 고방오리, 흰비오리, 청머리오리도 보였다. 큰 고니가 오리무리로부터 벗어나 얼음 위로 걸어간다. 이따금 큰 날개를 펴며 날아오르기도 한다. 김 박사는 “큰고니는 논의 나락도 먹지만 습지에서 수생식물의 뿌리를 즐겨 먹는다”며 “대부분 습지도 얼어붙어 먹을 것이 부족한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새만금의 비극, 새가 좋아하는 곳은 사람도 좋아한다=새만금 옥구염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폐염전터 앞으로 넓은 평야로 변한 갯벌이 펼쳐졌다. 흰 눈을 뒤집어쓴 벌판의 아득한 한 복판에는 갯벌이 죽으면서 나타난다는 염생식물 군락과 갈대숲이 보였다. 새들이 모여 있는 검은 점 같았다. 주변 농경지에는 기러기류 100여마리가 날아다녔다.

김 박사는 “이곳에서 봄과 초여름에 도요새류를 잡아서 가락지를 달아 날려보내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부터 도요새를 관찰하던 곳인 영종도, 남양만, 옥구염전 모두 개발되고 말았다”면서 “새가 좋아하는 곳은 사람도 좋아한다는 것이 새에게는 불행”이라고 말했다. 이제 한반도에 기착하는 도요새·물떼새류는 새만금방조제 너머 유부도에서 주린 배를 채운다. 인천 강화도 남단과 영종도 북단 갯벌이 기착지로서 중요해졌지만 그곳도 조력발전소 건설계획으로 위태롭다.

◇내년에도 적신호=김 박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겨울철새 마리 수가 가장 많은 곳은 가창오리가 어디로 안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올해에는 전남 해남 고천암호와 영암 영암호에 약 40만마리가 몰렸다. 찾아오는 철새의 종 다양성은 낙동강하구가 가장 높고, 강원도 철원에는 기러기류와 맹금류가 대거 머무른다.

올 겨울 낙동강에서는 경북 구미 해평습지 등 철새도래지에서 4대강 공사가 강행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부산지역 환경단체인 ‘습지와 새들의 친구’ 김경철 사무국장은 “4대강 공사로 철새들이 일찌감치 낙동강 하구까지 남하해 11월에는 무척 많았지만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최소한 겨울철에는 공사를 중단해 서식처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내년 이후에도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군산, 고창=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