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건용] 돌잡이 상을 보며
입력 2011-01-24 17:36
“아기의 갈 길을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세상… 온갖 길을 자유롭게 가게 해야”
손자뻘 되는 아기가 돌이 돼 오랜만에 돌잔치에 갔다. 생각해보니 아들뻘의 돌에 간 이후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결혼식 잔치가 정형화됐듯 이 역시 정형화돼 있었다. 예식장 비슷하게 장식된 파티장에 뷔페 음식을 차려놓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전문 사회자를 따라 잔치를 진행한다. 혼례식장에서 양가 어머니가 화촉을 밝히는 절차처럼 여기서는 양가 할머니가 아기의 목에 실타래를 걸어준다. 아기의 부모가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하객 모두가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기와 부모가 촛불을 불어 끄고 케이크 자르고 건배하고. 그리고 돌잡이 차례가 된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실, 연필, 쌀 정도가 놓였다고 기억되는데 오늘의 돌잡이 상에는 연필, 돈, 청진기가 놓인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지금, 오래 사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보장이 된 셈이니 실타래는 할머니들이 걸어주는 절차로 족한가 보다. 연필을 잡으면 고시를 통과하는 사람이 되고 돈을 잡으면 사업가가, 청진기를 잡으면 의사가 되리라는 희망을 배치한 것이리라.
옛날에는 ‘오래는 살겠다’ ‘먹고는 살겠다’ ‘벼슬은 하겠다’ 정도로 막연한 희망을 걸었다고 한다면 요즘은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력하게 아기에게 갈 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기가 갈 길이 너무나 좁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고 카피 중 하나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를 타이른 적이 있었다. 상당기간 지속된 것을 보면 호소력이 있었던가 싶다.
사실 언론이 사건을 다루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다. 은메달도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취재 열도와 언급의 적극성은 금메달에 비해 너무나 못하다. 세계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 그 예술가에게 온갖 조명이 쏟아지지만 그 이전에 했던 그의 똑같은 작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가 너무나 분명히 갈린다.
방송에 출연한 한 여성이 남자 키가 180㎝ 이하면 ‘루저’라고 했다가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아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그 여성의 의견도 맹랑하지만 그것을 ‘또 하나의 생각’으로 보아 넘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현상도 보통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외국 여성보다 스스로의 체중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문을 통해 밝힌 연구자의 얘기가 언론에 소개됐다. 그 연구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은 외국 여성에 비해 뚱뚱하다는 기준이 박하며 또 체중이 많은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요컨대 남성의 키에 대한 통념처럼 여성의 체중에 대한 통념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살기 힘든 세상이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한정돼 있고 1등과 나머지에 대한 대우의 차이는 극단적이며 심지어 신체적인 조건에까지 우열을 구분한다. 사람들의 열망이 비슷해지고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이기는 것만 생각해야지 한눈팔면 안 된다. 오로지 주어진 길과 목표만 바라보아야 한다.
자연히 서로 닮는다. 하긴 서로 닮아야 우열의 판별도 빨리 된다. 닮으면서 경쟁하니 아주 작은 차이도 곧 표가 난다. 표가 나니까 경쟁도 가속화된다. 결국 자신이 왜 이 경쟁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는 거대한 흐름이 된다.
이러한 환경이 심하면 문화는 척박해진다.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다양한 문화는 기대할 수 없다.
1등 경쟁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다가 어느덧 그 분야에서 미답지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설자리가 없어진다. 기발한 생각과 끈질긴 집념, 미련스러운 도전과 지극한 정성 같은 가치가 빛을 잃는다. 괴짜, 구도자, 반항아, 외톨이, 꿈꾸는 사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같은 성품들이 사라진다.
우리 아기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싶다. 온갖 방향으로 온갖 길을 자유롭게 가게 하고 싶다. 돌잡이 상에 무엇을 놓아야 하나?
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