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정치인의 표정연기
입력 2011-01-24 11:03
툭하면 졸병들을 집합시켜 구타하던 시절이 있었다. 야전삽으로 패고, 몽둥이로 두들기고, 명치를 주먹으로 때렸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군기가 빠졌다, 청소 상태가 불량하다, 복창 소리가 작다, 신참들이 나약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후방 가리지 않고 폭행이 잦았다. 이때 맞는 요령이 필요하다. 이를 악물고 버티면 맷집이 좋다고 더 때린다. 한두 대 맞고 죽는 시늉을 하면 엄살을 피운다고 더 때린다. 극과 극 사이에서 적당한 표정을 짓는 것이 상책이다. 30∼40년 전 교사로부터 맞을 때도 마찬가지다. 눈알을 부라리면 매타작만 돌아온다.
연예인 가운데 표정의 달인을 꼽으라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 역으로 열연한 고현정씨가 아닐까 싶다. 시청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선덕여왕에서 고씨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명연기를 펼쳤다. 고씨의 표정연기 사진 100장을 모아 놓은 100종 세트가 인터넷에서 유행했다. ‘천의 얼굴’이란 찬사는 덤으로 받았다.
언어폭력·표독한 얼굴은 곤란
표정연기로 먹고사는 연예인만큼 정치인에게도 표정관리와 화법은 대단히 중요하다. 1980년대 11대, 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 정권 시절에 ‘땡전 뉴스’라는 것이 있었다. 방송사 9시 뉴스 시간대에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되는 기사가 대부분 톱으로 보도된 것이다. 79년 12·12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80년 5·17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지 주로 위압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다고 국민이 그에게서 권위를 느꼈을 리는 만무하다. 현재 네이버 인물 정보에 올라 있는 시골 할아버지처럼 웃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이 지난해 12월 장외집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해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변호사, 법무부 장관을 지냈고, 4선 의원인데다 제1야당의 최고위원인 그가 대중집회에서 했다는 발언치고는 너무 고약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향한 천 의원의 언어폭력과 표독한 표정에서 국민은 희망을 읽을 수 없다.
국민참여당의 실질적 리더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일반 유권자들에게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는 특유의 독설과 빈정거림으로 자신의 여러 가지 장점을 까먹고 있다. 오죽했으면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김영춘 의원이 “맞는 이야기도 싸가지 없게 한다”고 비판했을까.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는 표현 하나로 한나라당 의원들을 악성 바이러스로 몰아붙인 그가 독설을 일삼지 말고 건전한 정책 대결을 벌이면 어떨까. 자신에 대한 비토세력이 견고하다는 걸 알고 있을 유 전 장관이 대권 꿈을 접지 않았다면 유권자에게 다가서는 표정과 화법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국민 마음 읽는 자세가 필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 12일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한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추모연설을 하며 반대파를 포함한 미 국민을 뭉치게 했다. 정치적 독설을 자제하고 단합을 촉구한 연설보다는 침묵과 슬픈 눈빛을 적절히 섞어 가며 희생자들에 대한 심적 고통을 표현한 오바마 대통령의 표정연기가 국민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이다. 미 언론은 “국가적 재난과 비극을 만났을 때 국민을 뭉치게 하고 위안을 주는 미국 역대 대통령의 전통을 오바마가 확인시켰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는 선거 때만 되면 손 따로, 시선 따로 노는 정치인들이 적잖다. 악수하면서 눈은 두어 사람 건너편을 보고 있는 정치인들 말이다. 유권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손만 잡는 후보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유권자의 눈높이를 알 턱이 있겠는가.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의 마음을 읽는 오바마 대통령의 표정연기와 화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