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산업화 시대의 아픔, 수려한 문체로 어루만지다…‘여성문학의 대모’ 故 박완서씨의 삶과 작품세계
입력 2011-01-23 22:45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
22일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의 글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문장’으로도 유명했다. 막힘없이 수려한 문체와 삶의 소소한 여정에서 이야깃거리를 낚아내는 통찰력,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낸 생생한 경험까지. 박완서는 그야말로 ‘우리시대의 작가’였다.
◇파란만장한 삶=1931년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기 위한 어머니의 집념은 소설 ‘엄마의 말뚝’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시대 태어난 모든 이들이 그랬듯 박완서의 유년과 청년기는 순탄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세대의 평범을 벗어나 특별히 가난하거나 불행했다고는 볼 수 없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전쟁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숙부와 친오빠가 전쟁 중 사망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했다. 당시 천재화가 박수근(1914∼1965)이 초상화부 소속 화가로 PX에서 일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후일 이 시기의 일들을 이렇게 술회했다.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이 시기의 일들은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은 거기 있었을까’ 등에 투영돼 있다.
전쟁 후인 53년 호영진씨와 결혼, 1남4녀를 둔 주부이자 어머니로 살았다. 소설가로서의 삶은 70년 ‘나목’이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불혹의 늦은 등단이었으나 40년간 보여준 활약은 눈부셨다.
◇시대를 반영한 작품세계=‘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는 급속한 산업화로 세상에 등장한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포착했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에서는 여성 억압적인 사회질서의 모순을 담아냈다. 시대적 아픔을 개인의 것으로 포착해내는 능력이 남달랐고, 내면화된 상처가 가감 없이 드러날 땐 사회와 시대를 성찰하게 했다.
분단·전쟁의 상처로 점철된 그의 젊은 시절 역시 작품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였다. 6·25전쟁의 상처 때문에 작가가 됐다고 말한 고인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로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70∼80년대 급성장한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드러난 욕망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기도 했다. 내면적인 서사보다는 선이 굵고 분명한 이야기를 살아있는 문장으로 그려 많은 독자와 공감을 나눈 작가는 여성의 억압 문제를 다루고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의 아픔을 그린 여성문학의 대모이기도 했다.
‘여성문학의 대표작가’로 인정받는 동안 사적인 인생까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잇달아 잃은 뒤 한동안 절망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해인 수녀와의 대담이 수록된 ‘대화’에서는 정신의 밑바닥에 침잠해 있던 그가 삶의 의욕을 되찾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평단뿐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고른 지지를 받았던 흔치 않은 작가였다.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따뜻한 당신’과 장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여자네 집’ ‘미망’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여럿이었다.
노년에 이른 뒤에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7월 발표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가까워져 오는 죽음을 내다보듯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며 죽음을 초월한 모습을 보였던 고인은 그렇게 가보지 못한, 더 아름다운 길을 찾아 떠났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