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재희] 서툰 피아노 소리
입력 2011-01-23 17:04
날은 춥지만 햇살이 가득한 날이다. 오늘같이 한가한 오후, 집에 있을라치면 이웃 어디에선가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난다. 멋지고 유창한 피아노 소리라면 여유로운 오후, 커피 한 잔과 함께 멋진 벗이 되겠지만 이 소리는 유창하고는 거리가 먼 소리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치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지금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아이라면 교본에 맞춰 연습하는 소리가 나야 할 텐데 이 사람은 늘 자기가 원하는 수준 있는 곡을 친다. 때로는 ‘넬라 판타지아’를, 때로는 한때 유행했던 유행가 ‘만남’을, 때로는 찬송가도 친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은 오른손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곡조를 더듬고 있지만 왼손은 어떤 곡이든 상관없이 도솔미솔로 반주를 맞춘다는 데 있다. 한적한 오후에 불청객이 찾아든 듯 나는 그 소리가 몹시 거슬린다.
문득 저 사람은 누구기에 서툴면서도 저렇게 열심히 피아노를 칠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젊은 엄마라면 아직 아이들 때문에 한가하게 피아노 앞에 앉을 여유가 있지 않을 테니 필경 성장한 자녀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칠 사람이 없는 피아노 앞에서 자신의 허전함을 달래고 있는 중년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곡을 멋지게 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겠지만 피아노를 배워 본 적도 없고 복잡하기만 한 악보를 따라 칠 재간도 없으니 서툰 대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저렇게 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른손은 더듬더듬 그런대로 곡조를 집어 낼 수 있지만 무슨 수로 왼손까지 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화음이 맞지 않는 서툰 소리를 내며 그 여성은 지금 낯선 피아노와 새롭게 사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의 어설픈 피아노 소리가 갑자기 애틋하게 맘에 다가왔다. 오랫동안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알뜰살뜰 살아왔을 그녀. 자신에게 맡겨진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스스로를 불태워 왔을 그녀.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중년이 된 어느 날, 잡히는 것이 없는 빈손과 텅 빈 둥지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공허한 그 여인의 아픔이 서툰 피아노 소리에 녹아 들리는 듯 여겨졌다. 비록 듣기 좋은 연주는 아닐지라도, 그녀의 연주를 애정을 가지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새롭게 배워가는 그녀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맘껏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삶의 새로운 장을 쓰고 있는 그녀의 용기를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응원해주고 싶었다.
힘내세요! 처음 걷는 그 길이 지금은 낯설고 서툴지만,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은 분명 멋지고 보람된 길이니까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길을 걸어가세요. 비록 서툴더라도 당신의 소리를 듣고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답니다.
김재희 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