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가난한 문인들 부의금 받지 말라”
입력 2011-01-23 17:03
한국 문단의 거목 박완서 선생이 ‘나목’처럼 육신의 옷을 훌훌 벗고 먼길을 떠났다. 22일 오전 6시17분이었으니 미명의 안개처럼 조용히,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 큰 별이 떨어지니 그를 따르던 후배 문인들의 울음소리가 크다. 문학인 아닌 사람들의 슬픔도 이에 못지않다. 문학과 삶이 다르지 않았기에 상실감이 더하다.
선생의 문학세계는 커다란 강물과 같다. 현대사의 영광과 질곡을 모두 껴안으며 도도한 물결을 이뤘다. 전쟁을 겪은 민족의 고난에서 아들을 보낸 참척의 슬픔까지 무수한 이야기가 그의 펜 끝에서 태어났고 독자들의 공감 속에 찬연한 문학의 탑을 완성해 나갔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이 그의 원고에 꽃을 바쳤다. 문학 열정은 끝이 없어 지난해 7월에 마지막 산문집을 냈으며, 떠나는 날까지 문학상 심사를 맡을 만큼 영원한 현역으로 살았다.
선생의 삶은 겸손하면서도 치열했다. 지금 북한 땅인 개풍 출신인 고인은 나이 마흔에 문단에 데뷔한 뒤 주옥같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기도 했으나 아차산 자락에서 텃밭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있었으면서도 군사정권에 맞서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거액의 돈을 내놓아 지식인의 몫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 적을 두었던 서울대학교가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그에게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도 이런 삶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례는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작가회의가 함께 하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진다. 2003년 이문구, 2008년 박경리 선생 이후 다시 좌우의 문인들을 선생의 이름 아래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문인들은 돈이 없다.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박완서 선생은 영정 속의 순박한 미소처럼 끝까지 세상과 문학과 후배들을 사랑하며 눈을 감으셨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 가득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