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의 로맨틱 신작 ‘환상의 그대’… 희망이란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군상
입력 2011-01-21 17:28
‘삶에는 신경안정제보다 환상이 필요하다.’
주인공 샐리(나오미 왓츠)는 이혼한 뒤 점쟁이에게 빠져 지내는 엄마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희망이나 환상 없이 지내기엔 엄마의 일상이 너무나 구질구질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영화 ‘환상의 그대’에는 엄마와 이혼한 뒤 창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버지, 출판사에서 연이어 거절만 당하는 소설가 남편, 은근히 호감을 느꼈지만 사실은 친구와 사귀고 있었던 유부남 직장 상사, 그리고 그들에게 둘러싸인 샐리가 등장한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희망이라는 이름의 비현실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선 환상이야말로 다 쓰러져가는 어두운 현실을 받쳐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영화는 잘난 것도 잘할 것도 없는 이들의 일상을 유머를 섞어 가며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점성술에 빠져 말끝마다 “크리스탈이 이렇게 말했어”를 외치는 어머니 헬레나, 임신했다고 말한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누구 아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아버지의 새 여자 샤메인,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의 남편 로이. 이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칠 때마다 관객은 웃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웃음 뒤 입가에 쓴맛이 남는 건 이 가족이 매번 부딪치는 난감한 순간에서 우리 역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일 거다. 환상이나 꿈을 이루기에 우리의 능력과 운이 항상 충분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겪는 이들에게는 비극인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실현되는 순간 그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이 되고 만다. 누가 이들의 어리석음에 돌을 던지랴. 겉으로 보기엔 밝고 유쾌하게만 그려지는 이 영화, 닳고 닳은 해피엔딩이라도 용납했다면 불쌍한 극 중 인물들을 위해 한 가닥 위안이나마 되었을 것을. 곱씹을수록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반추할수록 배어나오는 고약한 기분에도 아랑곳없이 우디 알렌 식 아이러니한 유머를 맛볼 준비가 된 관객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다. 그래도 결국, 유머라는 이름의 칼날이 위선을 베어내고 나면 알맹이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건 따뜻한 인간성이니까. 나오미 왓츠, 안토니오 반데라스, 앤서니 홉킨스, 조쉬 브롤린, 프리다 핀토 등 화려한 출연진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볼 만하다. 18세가. 27일 개봉.
양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