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 1995년 ‘프라자 회동’ … 인생항로, 부산으로

입력 2011-01-20 15:17


PIFF 15년의 기록 (3)

1995년 8월 18일 오전 10시, 저는 중앙대 영화과 이용관 교수의 연락을 받고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커피숍에 갔습니다. 부산에서 올라온 부산예술문화대학 김지석 교수와 영화평론가 전양준, 그리고 공연기획사 ‘열린판’의 김유경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선장격인 ‘집행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서 5억원을 협찬받기로 했다는 말도 곁들였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1년 전,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젊은 사람들 말만 믿고 참여했다가 망신만 당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위원장이던 94년 9월 저는 영화과 교수 한 분의 요청으로 ‘국제에버그린영화제’ 조직위원을 맡게 됐습니다. 공륜 책임자가 영화제에 관여하는 게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저는 전국극장연합회 강대진 회장, 서울시극장협회 곽정환 회장, 한국영화협동조합 강대선 이사장에게도 함께 조직위원으로 참여하자고 부탁했죠. 특히 그들이 걱정하던, 초청 영화에 대한 공륜 심의는 면제해주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런데 10월 29일로 예정된 개막일이 임박하자 그들은 일방적으로 국제영화제를 취소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공륜 심의를 받지 못해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벼락 맞듯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해명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취소한 사유야 많았겠죠. 주된 이유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채 졸속으로 추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적 망신이었습니다. 그랬던 일이 불과 1년 전인데 또다시 젊은 교수들의 제의를 받은 것이죠. 망설였습니다. 이것저것 짚어봤습니다. 이번엔 그들의 말에서 뜨거운 열정을, 표정에서 굳은 의지를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5억원을 지원받는다면 거기에 조금만 보태면 국제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집요한 설득에 승복하고 말았습니다. 집행위원장직을 수락한 것이죠.

물론 제가 수락한 데에는 몇 가지 사유가 있습니다. 당시 저는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저는 93년 3월 3일 문화부 차관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어 3월 17일 공륜 위원장에 선임됐고, 만 2년 근무하고는 사표를 냈습니다. 95년 2월 27일이었죠. ‘타의 반, 자의 반’이었습니다. ‘쇼궁 마에다’라는 영화와 올리버 스톤 감독의 ‘내추럴 본 킬러’가 문제였습니다. ‘쇼궁 마에다’는 일본 영화냐 아니냐가 쟁점이었습니다. 일본 영화 수입허가권을 갖고 있던 문화체육부가 ‘원제작자 국적이 미국이므로 쇼궁 마에다는 미국 영화’라는 유권해석을 공문으로 통보해 와서 수입심의를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2월 25일(토) 동아일보 사회면에 ‘위장 일본 영화 공륜심의 통과’라는 머리기사가 게재됐고, 월요일인 2월 27일 국민일보 사회면 톱기사는 ‘폭력영화 내추럴 본 킬러 공륜심의 통과’였습니다. 그날 오후 김도현 문화부 차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감’을 잡고 바로 사표를 제출한 뒤 그날로 퇴임했습니다. 영화진흥기구인 ‘공사’에 있다가 심의기구인 ‘공륜’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던 터라 즉시 사퇴한 것이지요. 이렇게 33년6개월의 공직 또는 준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쉬고 있던 때였기에 새로운 일에 뛰어들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모험을 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또 저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국제영화제는 꼭 필요하고, 언젠가는 개최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88년과 91년 몬트리올영화제, 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참가했습니다. 89~91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헝가리, 루마니아에서 각각 ‘한국영화주간’을 개최했습니다. 이런 기회에 모스필름과 렌필름의 스튜디오, 타슈켄트 알마티 부다페스트 근교의 영화촬영소들, 플로리다 올랜도의 엡콧센터, 디즈니 MGM스튜디오를 둘러봤습니다. 새로 조성하는 남양주종합촬영소에 들어설 스튜디오와 영화박물관을 가장 ‘이상적이면서 최선의’ 시설과 규모로 설계하기 위해서였고, 완공되면 그곳에서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려고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상의 일환으로 91년 12월 23일 공사 회의실에서 ‘국제영화제 개최를 위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임권택 김수용 이두용 하명중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한옥희 박기용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이영일(작고) 정용탁 정재형 정성일 박건섭 유지나 조희문 교수(평론), 언론계에서 윤호미 김량삼 정중헌 등 모두 20명을 초청했습니다. 모두 국제영화제에 경험이 많은 분들이었죠. 참석 인사들은 국제영화제 개최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영화제의 성격과 목적을 뚜렷하게 설정한 다음 시간을 충분히 갖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됐습니다. 후속 논의는 제가 2개월 뒤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다시 2개월 뒤 문화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중단됐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94년 1월 25일,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광복 50주년 기념 국민문화대축전의 일환으로 서울국제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언론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같은 해 5월 13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부가 후원하는 ‘서울국제영화제 창설을 위한 공개 토론회’가 세종문화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렸습니다. 저도 참석했습니다.

주제발표에 나선 조희문 교수는 세계 영화제에서 평가받은 작품들을 집중 소개하는 ‘영화제의 영화제(Festival of Festival)’를 열자고 했고, 유지나 교수는 아시아독립영화나 아동영화 같은 특별부문을 개발해 비경쟁특수영화제로 시작한 다음 어느 정도 알려지면 경쟁부문을 도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작고하셨지만 허창 평론가는 문체부가 영화제를 입안하면 정부 주도라는 인상을 준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주제발표자나 토론자들이 모두 국제영화제가 ‘필요하고 바람직’하지만 광복 50주년 행사로 개최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국제영화제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던 차에 부산에서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 마음이 쉽게 움직였던 것이지요. 95년 8월 18일 오전 10시의 ‘프라자 회동’은 부산국제영화제 탄생의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제 인생의 항로를 바꾼 ‘대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