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소설처럼 문인 11명의 여행기… ‘낯선 땅에 홀리다’
입력 2011-01-20 17:45
낯선 땅에 홀리다/김연수 외 11명/마음의 숲
여행기는 같은 공간을 다루더라도 쓰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집트에 가서 수학자는 피라미드의 수학적 원리를 고민하고, 소설가는 신비한 고대 문명의 거대 서사를 상상하듯 말이다.
‘낯선 땅에 홀리다’는 여행 에세이집이다. 장소는 일본, 포르투갈, 미국, 제주도…. 여행지 치고는 그다지 색다른 곳이 아니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행자가 국내 문학을 이끄는 11명의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 성석제 김중혁, 시인 정끝별 등 문인들이 낯선 땅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담았다. 이들은 여행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았고, 여행기에는 소설과 시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다들 문인이지만 총 11편의 여행기는 저자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다. 책의 첫 장을 장식하는 김연수의 포르투갈 여행기 ‘근검절약하는 서민들의 도시, 리스본의 추억’은 여행 중 벌어질법한 소소한 일을 다룬 단편소설 같다. 2008년 겨울, 김연수는 ‘무슨 배짱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도 한 장 없이 포르투갈 여행을 떠난다. 그가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숙소는 혼숙방인 믹스드 룸(Mixed room). 여성 룸메이트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달리 그와 한 방을 쓰게 된 이는 ‘일본 보완통화연구소 창설자 미구엘 야스유키 히로타’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명함을 쓰는 일본인 히로타씨. 김연수 편은 수다스러운 일본인 룸메이트에 대한 내용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파두’(트롯트와 비슷한 포르투갈 음악)를 라이브로 공연하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늦게 시켜 ‘파두’를 세 번이나 먹었다는 등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만약 저자의 향후 작품에서 포르투갈어, 일본어, 한국어에 능통한 수다스러운 일본인 캐릭터가 나온다면 그는 필시 히로타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리다.
김중혁의 스톡홀름 여행기는 그가 지난 9월 펴낸 소설 ‘좀비들’의 에필로그에 가깝다. 스웨덴 여행은 ‘좀비들’의 자료 취재차 갔기 때문에, 김중혁의 여행기는 이 소설의 탄생 비화를 담고 있다. 발음조차 어려운 스톡홀름의 묘지 스코그스키르코가르덴의 풍경을 보기 위해 스웨덴으로 날아간 그는 주구장창 묘지만 찾아 돌아다닌다. 공원처럼 펼쳐진 묘지들을 보며 그가 깨달은 사실은 죽음과 삶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이런 깨달음은 ‘좀비들’에 그대로 녹아 있는데 대표적인 게 묘지의 십자가를 보며 ‘더하기’ 같다고 묘사하는 부분이다. 묘지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는 “‘(우리는) 저 먼 별에서 우연히 이 지구로 날아와 잠깐 살다가 땅으로 더해지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좀비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김중혁의 여행기에서 소설의 많은 부분을 떠올리며 무릎을 칠 일이 많을 것이다.
여행은 장소와 주체도 중요하지만, 동행자도 여행의 즐거움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자작나무 내 인생’을 쓴 시인 정끝별은 제주도 서귀포를 여행했는데, 화가 이중섭과 함께했다. 이미 고인이 된 화가가 어떻게 동행을 했을까. 정끝별은 제주 서귀포 이중섭박물관과 그의 생가를 둘러보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고인의 인생을 반추하기 때문이다. 여행기의 첫 장부터 끝장까지 고인을 향한 추모의 마음이 가득하다. 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서있는 이중섭의 생가는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이를 그리워하며 쓸쓸히 생을 마감한 천재의 삶을 말하는 듯 해 정끝별은 옷깃을 여민다. 이중섭의 인생이 외롭고 서글퍼서 더욱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 시인은 그 마음을 시로 표현한다. 정끝별의 여행기 마지막 장에 실린 시 ‘서귀포의 돌담’이 그것이다.
성석제는 라오스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돌아왔고, 신이현은 오후 4시30분에 비가 내리는 도시 프놈펜을 하염없이 걸었다. 익숙한 것과 결별을 선언하고 준비 없이 떠난 여행. 그러나 그 곳에서 문학의 자양분을 얻고 귀중한 성찰을 하게 된 문인 11명의 여행기는 낯선 곳의 매력을 풍성하게 전해 준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