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성기철] 재외국민 투표 걱정된다

입력 2011-01-20 17:42


2002년 12월 19일, 미국 시카고. 한국에서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던 날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될 것인가는 지구 반대편 교민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교민들은 대선운동 기간 중 이회창 지지파와 노무현 지지파로 쫙 갈라졌다. 두 후보가 격하게 맞붙은 만큼이나 교민들 간 기 싸움이 거셌다.

한인회가 축하 모임 계획을 세웠지만 양측 지지자들은 이미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양측은 서로 다른 호텔에 만찬 장소를 정했다. 고국으로부터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눌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이 후보 지지자들이 예약한 호텔에선 행사가 취소됐다. 노 후보 지지자들만 환호성을 올리는 축하 만찬을 가졌다.

벌써 갈등 빚는 교포사회

현지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당시에 들었던 얘기다. 참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좀 더 잘살아보겠다고 조국을 등진 채 남의 나라로 옮겨간 사람들이 국내 정치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누가 당선된들 자기들 권익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 재외국민들이 단합하지 못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흔한 민주평통 자문위원 자리 하나 따내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게 우리 교민들이다.

2002년에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는지 모른다. 내년 4월 총선부터는 재외국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 교포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라는 2007년 헌법재판소 결정과 2009년 후속 입법으로 총선 비례대표 투표와 대선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데 따른 것이다. 교포사회의 국내정치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재외국민들의 투표권 행사가 가시화되면서 미국 한인사회에 정치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문제는 한인회가 분열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에선 두 회장 후보가 다투다 두 사람 모두 회장이 돼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조직이 둘로 쪼개졌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역시 회장 선거에서 두 후보가 경합하다 1명이 투표 마감 직전 사퇴함에 따라 후유증을 앓고 있다. 텍사스 주의 댈러스와 샌안토니오 한인회도 둘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 짐작컨대 유럽이나 중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국내 정치권이 재외국민 표심을 잡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최근 한나라당은 국회의원 모두가 참여하는 ‘재외국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개개인의 해외활동을 통해 교민들과의 접촉을 확대해나가겠다는 전략이다. 민주당도 뒤질세라 기존 ‘재외동포사업추진단’을 ‘세계한인민주회의’로 확대 개편했다. 여야가 해외 표밭갈이에 나서는 것은 재외 유권자가 240만명이나 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연한 일이다.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 각각 39만여 표와 57만여 표 차로 당락이 갈렸다. 재외국민 표가 결정적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해외 선거운동 제한 필요

선거가 임박해 정치권이 해외 유권자 공략을 본격화할 경우 교포사회 분열은 더 심화될 게 뻔하다. 갈기갈기 찢겨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교민들의 현지 적응과 발전에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선거에 사활을 거는 정치인들에게 자제를 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차제에 해외 선거운동을 일정 부분 제한하는 법적 장치 마련을 검토해 보면 어떨까.

선거가 과열되다 보면 갖가지 부정선거가 횡행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선거 당일 투표장 근처에서 무리 지어 몸싸움이라도 벌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투표 관리를 맡게 될 소수의 파견 선관위 직원과 공관원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정부와 선관위가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