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빈 밭을 보며
입력 2011-01-20 17:42
늦가을, 콩 타작을 끝으로 우리 집 한 해 농사는 거의 마무리된다. 이어 김장 배추와 무까지 뽑고 나면 밭이 맨 얼굴을 드러낸다. 언뜻 봐도 땅이 푸석푸석하다. 이른 봄부터 이것저것 쉴 틈 없이 생산해 냈으니 진이 빠졌을 만하다. 한쪽 구석에 겨울을 날 마늘과 양파가 심겨 있지만 그것들이 생기를 내뿜지는 못한다. 까칠한 바람이 마른 잎마저 쓸어가 버리면 밭이 텅 빈다. 이때쯤 이랑이 가장 길어 보인다. 밭이 모처럼 다리를 뻗는다.
밭이 다리 뻗고 쉴 때 사람도 쉬어야 한다. 강단 있다는 소리를 듣는 나도 가을걷이를 마치면 꽤 지친다. 한창 수확할 때는 괜찮다. 안으면 묵직하게 한 아름 꽉 차는 누렁 호박에 감탄하고,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고구마에 환호하느라 힘든 줄 모른다. 따고 캐고 끌어들이느라 그저 뿌듯하다.
결실의 기쁨을 어지간히 누렸을 즈음 몸 여기저기서 신호가 온다. 팔이 먼저 시작한다. 팔꿈치와 손목이 시큰거리며 새삼 존재를 알려오고 어깨가, 허리가, 무릎이 욱신거린다. 앉고 서고 누울 때마다 아이쿠, 소리가 따라 나온다. 팔이든 다리든 잠자코 역할을 해 줄 때가 좋다. 제 존재를 강조하면 모른 척할 수 없다. 급한 대로 파스라도 붙여야 한다.
가으내 파스 냄새를 풍기며 물리치료실을 들락거리면 친구들이 한마디씩 한다. 그깟 밭은 왜 사서 고생이냐고, 그만 없애버리라고. 밭은 아무 죄가 없다. 힘에 부칠 줄 모르고 턱없이 너른 밭을 고른 내 탓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덜컥 밭부터 마련한 것도 잘못이다. 귀농학교라도 다니며 미리 준비했더라면 좀 나았을 것이다. 작물의 특성쯤은 공부해 뒀어야 했다.
저마다 다른 작물의 성질을 헤아리지 못해 헛수고를 하곤 한다. 북을 충분히 줘야 할 땅콩은 내버려 둔 채, 고집스레 튀어나오는 옥수수 뿌리가 걱정돼 흙을 덮고 또 덮는다. 벨 때를 한참 놓쳐 포기마다 하얗게 알맹이를 쏟아 놓은 참깨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꼬투리가 벌어진 참깨는 건드리기만 해도 다 쏟아진다. 낫질이 서툴러 팔에 힘은 잔뜩 들어가고, 힘을 줄수록 깨는 자꾸 쏟아지고…, 진땀이 흐른다.
우리처럼 뒤늦게 농사를 시작한 경우 3년이 고비라고 한다. 2년까지만 해도 신기하고 재미있는데 3년째부터는 힘이 들어 싫증이 난다는 뜻이다. 잘 버틴다 해도 5년을 넘기기 쉽지 않다고 한다.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몸만 고되고 수확은 보잘 것 없어 실망하고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도 밭일을 한 지 5년이 되었다. 흙을 만지며 땀 흘려 먹을거리를 얻겠다는 마음은 아직 변함없다. 심고 가꾸는 일이 힘들지만 밭이 그만큼 돌려준다. 탐스럽고 알찬 열매, 반짝이는 알곡이 선사하는 기쁨은 키워 본 사람만 안다. 실수하고 실패한 지난 5년을 준비기간으로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야 한다. 밭이 이랑을 펴고 쉬는 동안 나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새 봄을 기다릴 것이다.
이화련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