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수천가지 감사
입력 2011-01-20 18:16
스위스 태생의 무명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가 미국으로 건너간 건 1947년. 아직 학생이었고 재능은 있었지만 주목받을 만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가장 공들인 작업은 1955년 구겐하임재단 지원금으로 촬영한 ‘미국인(The Americans)’. 전후 미국의 불안함을 비판적 시선으로 담아낸 흑백사진이다. 미국 내 반응은 차가웠다. 전후 재건을 꿈꾸던 미국인들에게 프랭크의 사진 속 그네들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루저’로만 보였다. 결국 그의 사진집은 1958년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되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서야 이듬해 미국 출판이 성사됐다. 이제 프랭크는 ‘미국 현대사진의 아버지’라 불린다. 문제작 ‘미국인’ 덕분이다.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로버트 프랭크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미국인’의 작품성을 알아본 출판기획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83세인 지금도 출판인이자 전시기획자,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로버트 델피르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델피르와 친구들’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전시다. 그가 오래 친분을 쌓아온 사진가들의 오리지널 프린트는 물론 평생 기획해 온 출판과 전시 자료들이 빼곡하다. 의사들을 독자로 그래픽 잡지를 발행하던 의대생이 어떻게 사진집 ‘포토 포슈’ 시리즈를 창간해냈으며, 프랑스 국립사진센터 관장으로 150여 차례 사진전을 기획했는지 한눈에 보인다. 프랭크와의 일화는 아주 작은 부분일 만큼, 얘깃거리와 음미할 거리가 많다.
기획자의 역할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는 신념답게 델피르는 늘 전시와 출판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런 탓에 그의 ‘친구들’은 사실 국내에선 델피르보다 훨씬 유명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는 의대생 시절부터 친분을 맺었다. 윌리엄 클라인의 다큐멘터리 필름 ‘무하마드 알리’ 또한 델피르가 제작자였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전 문화부장관 자크 랑, 사진가 요세프 쿠델카,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비롯해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앙드레 프랑수와까지 델피르와 친구들은 사실 20세기 프랑스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낸 주역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델피르의 인터뷰 필름은 압권이다. 정치가이면서 소설가이자 프랑스 한림원 종신회원인 에릭 오르세나가 인터뷰를 했고, 델피르의 아내인 사진가 사라 문이 감독을 맡았다. 질문은 유쾌하면서도 철학적이며, 답변은 현자의 말씀처럼 쉽지만 무르익었다.
본래 이 전시는 친구들이 델피르를 위해 마련한 일종의 헌정 전시로 기획됐다. 당시 델피르가 생각했던 전시 제목은 ‘수천가지 감사’였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책을 장정하고, 전시장을 디자인하는 이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여든 노장의 행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든 혼자서는 못한다. 이 전시는 일찌감치 그 사실을 깨달은 성숙한 이들이 서로 어떻게 의지하고 다독여 왔는가에 대해 수천가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사진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