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과 논·바다와 갈대·한국의 자연을 모아놓다… ‘철새들 낙원’ 겨울 순천만

입력 2011-01-19 17:32


겨울 순천만이 눈부신 속살을 드러냈다. 순백의 큰고니가 설원으로 변신한 갯벌을 무대로 ‘백조의 호수’를 연출한다. 흑두루미가 질세라 꽃보다 붉은 원형 갈대밭을 도화지 삼아 화조도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햇살에 반짝이는 도요새들은 오선지의 음표처럼 날아다니며 선율을 선보인다. 모두 순천만에서 만나는 겨울철새들의 우아한 비행술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에 둘러싸인 항아리 모양의 순천만은 산과 강, 바다와 섬, 논과 갯벌 등 한국의 정겨운 자연을 한곳에 모아놓은 한반도의 축소판이다. 여기에 도시와 포구, 철새와 갈대, 해돋이와 해넘이, 안개와 바람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린다.

70만평의 갈대밭과 800만평의 갯벌로 이루어진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 중 하나. 희귀 동식물이 공존하는 생명의 땅으로 2006년에 우리나라 연안습지 가운데 처음으로 람사르 협약(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존하기 위해 각국의 협력으로 맺어진 조약)에 등록됐다. 2008년에는 순천만이 국가명승지로 지정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나루(霧津)’로 불리는 대대포구는 순천만 여행의 출발점.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하는 대대포구에서 탐사선을 타고 갈대밭에 둘러싸인 S자 수로를 달리면 물 빠진 갯벌에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는 겨울철새들을 조우한다. 흰뺨검둥오리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낮잠을 즐기고 장식깃이 멋스런 댕기물떼새는 먹이를 찾아 홀로 갯벌을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누렇게 탈색한 갈대밭과 검은 갯벌, 그리고 추수가 끝난 논은 겨울 철새들의 은신처이자 보금자리.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10월 말부터 오기 시작한 흑두루미를 비롯해 검은머리갈매기,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민물도요, 가창오리,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 220여종 수만 마리의 겨울철새들이 날아들어 새들의 천국을 건설한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흑두루미는 순천만을 찾는 겨울 진객 중 으뜸. 4000만 년 전 공룡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흑두루미는 전 세계에 9500여 마리가 생존하고 있는 천연기념물로 주로 일본의 이즈미시에서 월동한다. 순천시에서 내륙습지를 복원하고 비행에 방해가 되는 전봇대 282개를 뽑는 등 생태환경을 개선하자 올해는 흑두루미 530여 마리가 순천만을 찾는 등 해마다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

8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순천만은 몇 차례에 걸친 간척사업으로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지, 갯벌 등 염습지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생명의 땅이다. 대대포구에서 장산마을 앞 갯벌체험장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둑길은 산책로이자 생태교과서. 겨울에는 흑두루미와 가창오리떼가 논과 갯벌을 오가며 환상적인 군무를 펼치는 포인트로 각광받고 있다.

순천만을 한눈에 감상하려면 대대포구의 무진교를 건너고 갈대밭 사이로 난 목교를 지나 용산에 올라야 한다. 용산은 산줄기가 용이 누워있는 형상으로 산마루에는 용산전망대가 위치한다. 물 빠진 갯벌을 수놓은 S자 수로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원형 갈대밭이 미스터리 서클처럼 펼쳐지는 풍경은 용산 전망대에서만 만날 수 있다.

갯벌의 단풍으로 불리는 칠면초는 갈색으로 시들고 짱뚱어는 추위를 피해 갯벌 2m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지만 갯벌은 여전히 살아있다. 철새들의 먹이창고로 변한 순천만 갯벌에서 순간 청둥오리떼가 날아오른다. 노란 부리와 초록색 머리가 멋스런 청둥오리가 날개를 접은 곳은 학섬, 사기도, 애기솔섬 등으로 불리는 똥섬. 철새들의 쉼터인 똥섬 너머로 멀리 고흥의 팔영산이 수묵화처럼 희미하다.

순천만의 갈대밭은 대대포구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순천만 하구까지 십리길을 따라 둥근 원을 그린다. 처음 한 포기에서 시작한 갈대밭은 7∼8년 후 지름 30∼40m 크기의 원형으로 성장한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던 원형 갈대밭은 결국 서로 연결되면서 대대포구처럼 거대한 갈대밭이 된다.

용산전망대에서 보는 갈대밭은 사철 색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봄에는 원형 갈대밭과 소금기가 많은 땅에서 자라는 염생식물인 칠면초가 연두색 새싹을 틔운다. 여름이 오면 갈대밭은 초록색으로, 칠면초는 붉은색으로 변한다. 순천만의 풍경은 가을을 으뜸으로 꼽는다. 하얀 갈꽃이 해질 무렵 햇살에 젖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습과 황금들녘은 순천만을 대표하는 풍경.

그러나 설원으로 변한 겨울 순천만 만큼 경이로운 풍경도 드물다. 눈이 귀한 남도지만 썰물 때 눈이 내리면 갯벌에도 눈이 쌓인다. 원형 갈대밭에 내린 눈은 바닷바람에 날아가고 설원으로 변한 갯벌만 남아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하지만 바닷물이 ‘무진의 안개’처럼 밀려오면 설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때맞춰 등장한 탐사선이 황금색으로 물든 S자 수로에 공작새의 날개 같은 물결을 만든다. 황금색 갯벌이 잿빛으로 변하기 직전에 드넓은 갯벌은 한순간 연분홍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빛이 약해지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스터리 서클을 닮은 원형의 갈대밭이 검은 점으로 변해 어둠 속에 묻히면 철새들도 갈대밭에서 고단한 날개를 접는다. 와온, 화포, 장산, 우명 등 이름조차 정겨운 순천만의 갯마을은 별빛처럼 희미한 가로등을 밝힌다. 그리고 짙은 어둠이 서서히 순천만을 점령한다.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고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한 순천만의 하루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순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