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기의 溫 시네마] 선택의 순간, 신앙인에게 던져진 질문

입력 2011-01-19 17:55


심장이 뛴다

만일 어머니와 아내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딜레마에 관한 물음일 것이다. ‘심장이 뛴다’는 아마도 이 물음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신실한 크리스천인 연희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아이를 살리자면 다른 이의 심장이 필요하다. 뇌사 상태에 빠진 엄마를 살리기 위해 양아치 아들 휘도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둘 다 명분은 충분하지만, 그러나 심장은 하나뿐이다.

‘심장이 뛴다’는 이런 약점을 가진 두 캐릭터가 서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매순간 선택의 당위성을 놓고 충돌한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유치원 원장인 연희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베풀 줄 아는 중산층 교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딸아이가 있다. 불법적인 장기매매를 시도하면서까지 딸아이를 살리고자 했건만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몰라 기도하고 갈등한다. 이제 합법적인 기증자를 기다리기엔 딸이 수술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

반대로 길거리에서 이른바 ‘콜떼기’를 하지만 한탕을 꿈꾸는 그저 그런 인생 휘도는 재가한 엄마한테서 돈을 뜯어내는 게 커다란 수입원 중 하나인 명백한 양아치이다.

그러던 중 엄마가 갑자기 쓰러져 연희의 딸아이가 심장 수술을 기다리던 그 병원으로 실려 간다. 휘도는 뇌사 상태인 엄마의 심장을 사겠다는 연희의 제안을 ‘살 사람은 살아야 된다’라는 당위성으로 무장하면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병원에 누워 아직은 살아있는 엄마를 본 순간 혹시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심장이 뛴다’의 이야기 구조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꿰맞추는 플롯이 아닌 상황에 따른, 즉 선택적인 순간에서 두 캐릭터가 가지는 심리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들고 찍기’로 프레임을 흔들면서 관객들의 마음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잘 짜여진 ‘각본’ 같은 느낌보다는 즉흥적인 ‘트위터’ 같다. 더군다나 관객의 감정을 끌어내는 방법은 어쩐지 신파다.

그러나 그 어느 영화보다도 기독교적이고 또한 진정성 있는 신파이기에 재미있다. 연희가 딸아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할 때, 장기매매를 포기하고 돌아설 때 관객은 연희를 연민하지만 정작 믿음이 깊은 그녀가 딸을 살리기 위해서 ‘악’과 타협할 때, 아니 연희가 ‘악’이 될 때 관객은 그녀와 동화된다. 아마도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우리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모순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때로는 신께 반항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양아치 같은 휘도의 삶은 어떠한가. 평생 자신의 엄마를 등쳐먹는다고, 혹은 길거리에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산다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우리는 우리 엄마에게 휘도와 같이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영화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의 이미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때로는 ‘목사’가 나오는 영화에서도 기독교는 영화의 스토리를 풀어가기 위한 하나의 소재로서만 인식될 뿐이다.

‘심장이 뛴다’는 비록 교회도 나오지 않고 주인공의 깊은 신앙적 사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연희와 휘도 두 캐릭터의 내면의 변화를 통해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 영화의 최고의 가치는 구원에 관한 기독교적인 엔딩이다.

(서울기독교영화제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