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경찰청 과학수사계 이현주 검시관… ‘죽은 자들에게 말 걸다’
입력 2011-01-19 17:56
방영 중인 SBS 수목드라마 ‘싸인’이 법의학 세계를 다뤄 화제다. 박신양이 법의학자 ‘윤지훈’으로, 김아중이 검시관 ‘고다경’으로 출연했다.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김아중의 모습은 검시관의 삶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실제 검시관으로 근무 중인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이현주(41) 팀장을 지난 17일 수원 경기지방경찰청에서 만났다.
술을 가볍게 보는 인식부터 변해야
이 팀장은 국내 검시관 1기다. 2005년 임용돼 2006년 6월부터 현장에 배치됐다. 지난 4년 반 동안 사건 400여건을 맡았다. 이처럼 숱한 사건현장을 거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술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이다. 사건 대부분이 술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 술 먹고 부인을, 아들을, 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술 먹으면 평소에 쌓인 불만이 터져 나와요. 그러다 보면 다툼이 생기고 살인사건으로 이어져요. ‘술 취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아요. 술을 가볍게 보는 인식부터 변해야 합니다.” 그도 간호사로 근무할 때 술을 조금 마셨다. 환자가 죽어갈 때 술이 위안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검시관은 사건 현장에서 사인을 밝힌다. 둔기, 날카로운 물체, 기도 폐쇄, 약물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를 확보한다.
드라마에서 고다경은 한 의문사 사건을 규명하면서 검시관의 한계를 느낀다. 이후 부검의가 된다. 드라마는 부검의에 집중한다. 부검의는 먼저 검시관이 조사한 시신을 인계 받아 해부해 죽은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한다.
이 팀장은 “사인을 찾고 증거물을 확보하는 데 검시가 부검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국과수에서 6개월 동안 부검을 했다. 2000년 의약 분업으로 의료진이 파업할 때는 수술실에서 의사 역할도 했다. 수술부위를 직접 다뤘다. 경찰대병원에선 중환자실에 근무했다.
“타박상을 입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시퍼런 멍이 보이잖아요. 시신 발견 당시에는 가해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요. 그에 반해 부검실에 도착할 때면 선명해지죠. 그러면 죽은 원인도 쉽게 드러나죠.”
검시관의 소견 수사의 향방 좌우
그는 사건 해결의 기여도로 치면 부검의보다 검시관의 역할이 더 크다고 말했다. 초기에 검시관이 밝힌 사인은 수사의 향방을 좌우한다. 타살로 보이면 상당한 수사 인력이 투입된다. 용의자를 초기에 검거하려는 것이다. 자살 혹은 사고사로 추정되면 기본 인력만 배치된다. 수사 효율성에 검시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검시관은 신고를 받고 먼저 현장에 도착한다. 훼손되지 않은 상태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후 시신에 집중한다. “주로 코와 눈, 목에 모든 것이 나타난다. 시신을 보통 2시간씩 샅샅이 뒤진다”고 말했다.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의 분석실은 대학 실험실습실 같았다. 인체의 뼈 구조물, 인체 장기 모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증거물을 50배까지 확대해 볼 수 있는 기기, 몽타주 제작을 위한 컴퓨터, 지문 확인에 필요한 약제 등이 정돈돼 있고, 현장을 사진으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카메라, 머리카락이나 털실 등을 채취하는 키트, 유전자 검사를 위한 타액 채취도구 등도 눈에 띄었다. 미국 드라마 ‘CSI(Crime Scene Investigation)’에서 볼 수 있는 도구들이었다. 우리 과학수사계도 미국의 CSI와 같다. 우리도 CSI로 불린다.
드라마 ‘싸인’에 나오는 검시관과 실제를 비교해 달라고 했다. 가장 큰 차이는 수사권 보유 여부라고 했다. 실제 검시관은 수사권이 없다. “드라마에서 검시관이 유족이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탐문 수사를 하던데 실제는 그러지 못해요. 경찰이 아니기 때문이죠. 유족에게 질문을 하려 해도 항상 경찰을 통해야 해요. 경찰도 바쁘고 중간에서 왜곡, 누락될 가능성도 있고 불편한 면이 있어요.”
현장의 처참한 장면 일부러 기억
검시관은 경찰을 지원하는 일반직 공무원에 해당한다. 미국 드라마 CSI에 나오는 검시관도 ‘싸인’처럼 경찰이다. 이들이 직접 사건을 해결한다.
전국에 검시관은 50여명밖에 없다. 이 중 절반이 여성이다. 대부분 간호사 출신이다. 시신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환자의 주검과 피살자의 주검은 엄연히 다르다. 피살자는 대부분 처참하다.
“현장에 가면 이런저런 것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사람이 죽은 현장은 온통 긴장감에 휩싸여 있지요. 거기다가 경찰은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나 현장을 벗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처참한 장면이 떠올라 한동안 힘들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검시관은 그 장면을 일부러 기억한다. 법인을 잡을 때까지다. 상처부위, 시신이 놓인 위치, 훼손 정도 등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머리에 저장한다.
범인을 못 잡으면 그 기억을 계속하게 돼 미제사건 현장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된다고 말했다. 오래전 한 학교의 운동장에서 여성 한 명이 살해됐다. 증거는 없었다. 그나마 침이 묻어있을 법한 종이컵이 있었다. 이 역시 피해자의 피에 젖어버렸다.
그는 비슷한 범행이 발생하면 항상 이 사건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동일범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제로 남아 있는 사건은 4∼5건이다.
안타까운 사건도 많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죄를 묻기 전에 범행을 막지 못한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묻고 싶은 사건이다. 어린 조카가 살해당하고 20대 딸이 성폭행당했다는 신고였다. 출동해보니 내부인 소행이었다. 사건 당시 피의자가 입고 있던 상의를 발견했다. 상의는 20대 딸의 것이었다. 이 딸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엄마는 선풍기의 방향을 어린 조카에게 향했다. 딸은 이를 시기했다. 그러면서 머지않아 자신을 쫓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카만 없어지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엄마는 딸의 범행사실을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신우회 총무
“죽은 아이도 불쌍하고, 정신질환을 가진 딸도 안됐고, 딸 때문에 그동안 힘들게 살았을 엄마를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정신질환은 한 가정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정신질환을 앓는 자식과 동반 자살하는 부모도 많다. 얼마 전 40대 자식에게 약을 먹이고 70대 자신도 따라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외에도 가정 내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린이 성 폭행, 부모가 자녀를 가해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 또는 부부 간에 벌어진 사건 등이 그렇다.
이 팀장은 유능한 검시관으로 꼽힌다. 다양한 경험이 토대가 됐다. 그의 소견은 거의 부검 결과와 일치한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팀장의 의견은 수사 과정에서 크게 참조된다.
그가 검시에 앞서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도록 조속히 검거되는 것. 이 팀장은 검시에 앞서 항상 확실한 증거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살인자 강호순, 유영철을 일찍 잡았으면 그렇게 많은 피해자가 없었을 거라고 역설했다.
이 팀장은 물론 크리스천이다. 독실하다고 소문이 났다. 경기지방경찰청 신우회 총무다. 그는 간호사에서 검시관이 되는 과정이 우연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는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며 의료 사고를 낼 뻔했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생후 9개월 아이에게 링거를 과다하게 주사했다. 수분 과다는 이 아이에게 치명적이었다. 초보였던 그는 이를 몰랐다. 다행히 수분은 소변으로 나왔다. 이 팀장은 이때 간호사로서 남이 안 하는 힘든 일에 헌신키로 서원했다.
또 의약분업 때 수술부위를 직접 다루며 해부학적인 경험을 가진 점, 경찰대병원 중환자실 근무, 그러다 병원 로비에 붙은 검시관 모집 광고를 본 것까지 하나님이 적극 관여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범죄 예방의 길은 오직 예수
그러면서 그는 “범죄자를 교화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길은 오직 예수”라고 강조했다. “모든 범죄자들이 단순 절도부터 시작해요. 그러다 날치기를 하고 주거 침입을 하고 안 들키려고 살인을 하죠. 청소년기에 복음을 전해야 해요. 그래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도 제안했다. 갈수록 심각한 청소년 범죄를 줄이기 위해 교회가 공간을 할애하고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등 구체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매일 점심시간에 신우회원들과 기도한다.
또 청소년 사역자, 소년원 사역자들과 청소년 교화방법을 모색하고 기도제목을 나눈다. 그는 “평소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도 하다보니 수다쟁이로 오인되고 있다”고 웃었다.
간호사에서 검시관으로 바꾼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고 물었다. “간호사로 일할 땐 늘 희망을 접했어요. 하다못해 흉기에 찔린 사람도 소생, 회복의 기회가 있으니까. 하지만 검시관으로 접하는 시신은 이미 ‘절망’이에요. 유족들도 가족을 잃은 슬픔,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절망하고 있죠.”
이 팀장은 말을 이었다.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제 소명인 것 같아요. 또 피해자의 ‘싸인’을 듣고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 일을 통해 삶이 진지해졌다는 말도 했다. “피해자는 그런 ‘싸인’도 보내는 것 같아요. ‘시간을 아끼고 가치 있게 써야 한다’고요.”
글 전병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