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서울서 만나는 ‘왕오천축국전’

입력 2011-01-18 17:49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의 작은 유리상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희미한 조명 속에 펼쳐진 폭 42㎝의 누런 종이 두루마리. 국사 시간에 외웠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펼치면 358㎝에 이르나 깔린 것은 겨우 60㎝. 나머지는 돌돌 말린 상태다. 유물을 빌려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제시한 조건이 그렇단다. 일본에서 빌려온 ‘몽유도원도’는 그나마 전모를 볼 수 있었는데.

주최 측은 ‘1283년 만의 귀향’이라 했다. 혜초가 723∼727년 지금 인도에 해당하는 다섯 천축국과 서역을 다녀온 뒤 집필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셈했다. 혜초는 신라 출신이지만 여행의 시작과 끝은 당나라였고, 책은 그동안 한번도 고국에 들른 적이 없으니 굳이 따지면 ‘귀향’이 아니라 ‘방문’이다. 혜초의 혼이 책에 실려 돌아왔다면 또 모를까.

혜초는 슈퍼스타다. 신라국의 15세 소년이 중국 유학을 떠났고, 19세 대학생 신분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방학기간이 아니라 4년에 걸쳐 2만㎞의 대장정이었다. 당시 여행은 목숨을 건 것이었다. 404년에 15명이 천축국으로 떠났다가 가는 길에 10명이 죽었고, 장안으로 돌아올 때는 2명만 남을 정도였다.

‘왕오천축국전’은 한국인 최초의 기행문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더불어 기록문학의 백미다. 글은 문명탐험적 요소가 많다. 토번국(티베트) 묘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털옷과 베옷을 입어 서캐와 이가 많은데, 이를 잡으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눈물에 젖어 고향 경주를 그리워하는 시도 있다.

혜초 다음으로 놀라움을 던져주는 인물이 프랑스 학자 펠리오다. 1908년 돈황을 찾은 그는 막고굴의 고문서 더미 속에서 이 필사본을 보고는 금방 ‘왕오천축국전’임을 알아차렸다. 동양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이었다. 일본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는 1915년에 이르러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동안 우리는 문맹이었다.

‘왕오천축국전’도 우리 것이라며 반환을 주장하는 이가 있으나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와 다르다. 헐값이었을지언정 펠리오가 돈황의 석굴을 지키던 왕원록에게 구입한 것이니, 정당한 소유권 이전으로 본다. 첫 나들이로 저자의 고국을 찾았지만 대여기간은 겨우 3개월이다. ‘실크로드와 돈황전’은 4월 3일까지 이어지는 데 비해 ‘왕오천축국전’은 3월 17일 귀국길에 오른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