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눈 위에 쓰는 詩

입력 2011-01-18 17:41


사붓사붓 내리던 눈발이 굵어지더니 제법 흐벅지게 내린다. 그해 겨울에도 올해처럼 눈이 흔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님에게 몇 가지 상의하러 연구실로 들르겠다고 전화를 했다.

“밖에 눈송이가 참 예쁘지?”

교수님은 창 밖의 눈을 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칠순이 가까운 노교수 눈에 비친 눈꽃송이. 긴 세월 세파에 무디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당신의 감성은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빈 들을 달리는 버스의 승객들은 하나같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비닐 온상 위에 덮이는 눈발로 사위는 점점 넓어져 간다. 흩날리는 하얀 점들이 산수화의 여백을 이룬다. 벌거벗고 성기기만 한 산과 황량하던 들이 포근한 품으로 팔 벌려 다가온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교수님은 손수 차를 끓여내 주었다. 고산지방에 다녀왔다며 잘 말린 에델바이스 세 송이를 꺼내 주었다. 눈처럼 하얀 꽃송이가 순결해 보였다. 산간지방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꽃으로 환생한다면 에델바이스가 될 것 같았다.

“한 송이가 아니라 세 송이라는 데 의미가 있어.”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렸다. “셋은 사랑이야. 어때, 가슴 두근거리지 않아?”

교수님의 짓궂은 눈빛에 해맑은 겨울 소년이 웃고 있었다.

상가의 불빛과 자동차의 전조등, 브레이크 붉은 빛이 눈길 위로 안온하게 퍼진다. 어스름이 깔리는 가로등 아래 내리는 눈발은 불을 향해 모여드는 부나비처럼 보인다. 그리운 사람들은 연인의 가슴에 시를 쓰고, 시인은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고 했던가. 시인의 감성을 닮고 싶건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은 계속 쌓인다.

서점에라도 가려고 거리로 나섰다. 가까이서 눈을 맞을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책을 골라들고 계단을 나설 참이었다. 누군가 머리의 눈을 털며 어깨를 친다. 한때 같이 문학을 하던 K였는데 약 2년 만에 만난 셈이다.

“그쳤는가 싶더니 또 눈이 오네요.”

오랜 해후였지만 악수도 하기 전에 그는 눈 얘기부터 꺼낸다. 가까운 찻집에 들러 그동안의 근황을 털어놓았다. 찻집 주인은 오

늘은 눈도 오고 일찍 문을 닫아야겠다며 미안해했다. 그 사이 내린 눈은 기온이 내려가 지하도 계단에 얼어붙었다.

조심조심 내딛는 내 걸음이 맘이 놓이지 않았나보다. 보다 못한 그가 한쪽 손을 잡아주려 한다. 갑작스레 당황한 나는 잡혔던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그의 낯빛이 붉어진다. 얼마나 세월이 흐르고 몇 번의 겨울을 보내야 그의 호의를 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얀 눈송이가 희뜩희뜩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가고, 시간도 가고 없다. 눈이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오늘처럼. 주머니에서 두 손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눈을 받았다. 하얀 눈송이 위에 그리움을 적어나갔다.

“발신인도 없이/ 내게 온 편지/ 두 손바닥 내밀었더니/ 형체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글로도 /말로도/ 내보일 수 없던/ 그대의/ 마음이런가.”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