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8) “간호사님,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고 싶어요”
입력 2011-01-18 17:58
내가 그 환자에게 물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제발 하루라도 아버지의 저 소리를 좀 안 듣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다잉 영’이 보고 싶습니다.”
‘다잉 영’은 당시 종로3가 세기극장에서 상영하던 영화명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미술사를 전공했지만 꿈을 펼치기도 전에 뇌암에 걸려 죽어가는 주인공과, 돈을 벌기 위해 간호사로 속이고 그에게 접근한 ‘속물’ 여성과의 사랑 얘기가 주요 스토리다. 두 사람은 결국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주인공은 행복하게 죽음을 맞는다. 나는 어떡해서든 그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서 차를 태워줄 자원봉사자를 섭외한 뒤 그의 집으로 갔다. 입김이 쩍쩍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12월 말이었다. 아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코웃음을 쳤다.
“이런, 당신들도 미쳤군! 죽어가는 애한테 영화는 무슨 영화!”
아버지의 욕설을 뒤로 하고 우리는 눈, 코, 입만 빼고 아들의 온 몸을 감싼 뒤 차에 태웠다. 휠체어도 자동차 트렁크에 실었다.
극장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좌석은 모두 매진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환자를 어렵게 데려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덜덜 떨며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를 보니 더욱 난감했다. 문득 환자는 휠체어에 앉아 있으니까 굳이 좌석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저 극장에만 들여보내 주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매표소 입구에 가서 급히 매니저를 찾았다. 직원이 귀찮다는 듯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잠시 후 키가 크고 체구가 건장한 남자가 와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나는 사정을 얘기하며 부탁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이 영화를 보는 게 환자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내 말을 듣던 매니저가 극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이리 들어오세요.”
매니저는 앞장서서 사람들을 밀치면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줬다. 그리고는 직접 휠체어를 끌고 극장의 가장 중앙으로 데려다 줬다.
영화를 보고 나온 환자는 무척 행복해했다. 그날 밤 아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들은 척도 안하자,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미안해요. 제가 아들 노릇을 못해서….”
아버지가 다가와 아들을 와락 안았다. 그리고 아들은 그 사흘 뒤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모두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우리가 환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서 다소 위안이 됐다. 바로 이런 것이 호스피스 케어다. 생로병사의 현장을 지키며 보살피는 이것이 ‘간호사의 특권’이다.
사람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무리하는 게 꼭 대단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이 환자의 경우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죽음을 준비했다.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어렵지 않다. 조그마한 배려, 생각, 행동, 돌봄 행위가 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환자를 보러 갈 때마다 기도를 한다. 매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고 충전되면 환자를 사랑하고 돌볼 수가 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