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1-01-18 17:54


(28)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영적 성장은 은혜로 되지만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니다. 은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시내산에 올라 계명을 받는 것은 은혜지만 일단 계명을 받으면 우리는 그 계명 앞에 서야 한다.

계명을 받는 것만 은혜가 아니요, 계명을 지키는 것도 은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라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다”(요 14:21). 받는 은혜와 지키는 은혜가 하나요, 계명을 지키라 명하신 분과 나를 사랑하라 명하신 분도 하나다. 언제나 믿음의 원리는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가는 것이다.

훈련은 우선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현재 모습에 한없이 불만족하는 사랑이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사랑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거부하는 것이다. 거부할 것이 없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다. 은혜로 받아들여진 우리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영적 훈련의 시작이다. 훈련은 또한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갈 2:20). 우리는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긍정해야 하며 또한 부정해야 한다. 육체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집”(고전 6:19)이며 동시에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20)가 머무는 곳이다.

육체(body)는 사랑하고 육신(flesh)은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영-혼-육 순서로 임하고 마귀의 유혹은 육-혼-영 순서로 임한다. 육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어느 수도원에서 한 젊은이가 “나는 죽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소리치고 다녔다. 노인이 그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형제여, 너무 자신만만하지 마시오. 형제는 형제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아직 사탄은 죽지 않았소.” 그렇다. 우리가 설령 우리 육체를 이길 수 있다고 해도 사탄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때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딤후 4:7∼8). 존 크리쿠마스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어느 한순간도 영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훈련은 마귀의 최대 작전이 우리로 하여금 나쁜 습관에 빠져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마귀는 우리에게 교회에 나가게 하고 은혜 받게 하고 직분도 받게 하지만 악한 습관에 매여 있게 함으로써 우리를 구속한다. 우리가 악한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마귀는 놀라지 않는다.

훈련은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후 10:4).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악한 습관을 버리고 성경에 기초한 옳은 습관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시 119:30). 회심은 우리의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 다음은 평생 훈련이 따른다. 그것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 자기와 싸우는 싸움이 최고의 싸움이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은혜로 간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