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시대’ 춥고 배고파서… 약값이 없어서… 사정 딱한 생계형 범죄 는다

입력 2011-01-17 18:36


서울 봉천동의 한 마트에서 참기름 한 병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주부 전모(44)씨가 지난 14일 오후 4시30분쯤 매장 직원에게 붙잡혔다. 종이 쇼핑백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전씨가 불안한 듯 계속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이 직원의 눈에 포착됐다. 직원은 참기름을 봉투에 담다가 재빨리 바코드 리더를 전씨의 쇼핑백에 갖다 댔고 ‘삑’하며 바코드 읽히는 전자음이 들렸다.

쇼핑백에서 나온 것은 칫솔 3개를 묶은 1만여원짜리 칫솔 세트. 평범한 주부인 전씨는 경찰에서 “칫솔이 필요했는데 돈이 모자라 훔쳤다”며 눈물을 흘렸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전씨를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지난 13일 오전 4시50분쯤 지하철 4호선 수유역 6번 출구 앞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60대 노인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하철 운행이 시작되기도 전인 이른 새벽에 김모(67)씨가 배포용 무가지 60부짜리 한 뭉치를 훔친 것이다. 김씨는 “2년째 간암 투병 중인데 돈이 없어 약값을 마련하려고 훔쳤다”며 “고물상에 팔면 돈이 될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김씨를 신고한 신문보급소장은 “60부 뭉치를 고물상에 내다 팔면 2000원도 못 받는다”며 “노인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추운 새벽에 신문을 훔치러 나왔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강북서는 김씨를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으로 생활필수품을 훔치거나 의식주를 마련하려고 소액의 물품을 절도하는 생계형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독거노인 박모(67)씨는 지난 4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서울 신림동 한 마트에서 라면과 참치캔 등을 훔치다 관악서에 불구속 입건됐다.

서울 양평동의 한 오피스텔 현관에는 지난 14일 ‘경비실 난로 가져가신 분, CCTV에서 얼굴을 확인해 경찰서에 신고할 예정이니 수일 내로 가져오세요’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경비실 관계자는 “경기가 하도 어려우니 전에 없던 일이 발생한다”며 혀를 찼다.

강북서 관계자는 “요즘엔 아파트에 배달되는 우유나 신문이 없어졌다는 신고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동대문서 관계자는 “누군가 잠시 길가에 물건을 놓아둔 것인데 ‘버린 줄 알고 가져갔다’면서 붙잡혀 오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물가가 오를 때마다 ‘장발장식’ 생계형 범죄가 증가한다”며 “경기가 침체되고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사회 전반의 준법의식이 저하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현 임세정 최승욱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