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한반도 얼다
입력 2011-01-17 18:21
놀다, 살다, 울다, 팔다, 날다, 풀다, 걸다, 말다, 들다 등.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난 연말 한 송년모임에서 심심풀이로 단어 찾기 게임을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동사 하나를 들고 그 이유를 대자는 것이었다. 그렇고 그런 송년모임을 접한 터라 다소 엉뚱한 제안이었지만 모두 쉽게 응했다. 놀이의 신선함 때문인지 게임은 퍽 진지했다.
첫 번째로 꼽힌 건 ‘놀다’였다. 인생에 노는 것만 한 게 있느냐는 설명이 뒤따르자 다들 맞장구를 쳤다. 보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살다’가 아니겠느냐는 주장이 나왔고, 어려운 세상인데 힘들 땐 그래도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울다’는 어떠냐는 제안이 이어졌다.
의외로 ‘울다’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긴 어른이 된 뒤론 소리 내고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기만 하는 게 보통이니…. 한국이 이만큼 먹고 살게 된 데에는 수출을 많이 한 덕분이니 ‘팔다’도 괜찮겠다는 주장도 있었다.
‘날다’는 덕담이었다. 새해에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거칠 것 없이 펄펄 날기 바란다는. ‘풀다’를 거론한 이는 이 땅의 모든 어려움이 다 풀렸으면 좋겠다며 새해인사를 미리 했다. 그렇게 한번 기대를 걸어보자는 이는 ‘걸다’를, 대단한 입담들이라며 한 자락 칭찬을 말아 올린 이는 ‘말다’를 끌어댔다.
한참 동안 그렇게 덕담이 오가자 누군가 지적했다. 이 모든 동사의 어간이 ‘ㄹ’ 받침으로 끝난다는 게 아닌가. 공통점은 ‘ㄹ’ 받침이었던 것이다. 그리곤 예를 더 들어보겠다며 ‘들다’를 앞세웠다. ‘ㄹ 받침 희망론’이 터져 나온 건 그 즈음이었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잘 놀기 위해, 멋지게 살기 위해, 울음도 참지 말고, 열심히 팔고, 앞을 향해 날며, 인생을 풀어내는 지혜를 구하는 데 시간을 걸고…. 게임은 이미 끝났는데도 모두는 비슷한 단어를 앞세우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강추위가 계속되는 아침 출근길에 문득 ‘ㄹ 받침 희망론’을 떠올렸다. 그런데 아뿔싸, 터져 나온 단어는 ‘얼다’였다. 그것도 꽁꽁 얼어붙은 한반도. 처음부터 ‘ㄹ 받침 희망론’은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새해 벽두부터 강추위를 비롯해 구제역, 남북관계 등 팍팍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영 마뜩찮다.
그래도 빌어 본다. 한반도의 긴장이 어서 풀리고, 구제역 때문에 자식 같은 가축을 잃고 속앓이하는 농민들도 크게 한 번 울고 나서 다시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ㄹ’ 받침 동사에 ‘빌다’를 추가하고 싶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