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남형두] 알아들을 수 있는 철학 강의

입력 2011-01-17 18:21


“가르치는 것에 취약한 한국 대학… 경륜 있는 교수가 교양강의 맡아 관심 끌어내야”

서른 해 전, 당시 대학 신입생의 교복이라 할 수 있는 코르덴 재킷을 입고 교내 철학동아리 두어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름은 달랐지만 일본어로 된 마르크시즘 경제학 책을 독회하는 점은 같았다. 당시 철학은 곧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철학에 대한 갈증으로 법철학 강의를 두 번이나 신청하였으나 귀에 들릴락 말락 한 교수의 강의는 나의 지적 아둔함만을 일깨웠을 뿐 매번 끝을 보지 못하고 수강신청 철회로 막을 내렸다.

뒤늦게 미국에서 유학할 때 지도교수는 자기와 공부하려면 5편의 논문을 읽고 오라고 하였다. 논문은 뜻밖에도 칸트, 헤겔, 로크, 벤담 등 철학을 법학에 접목시킨 것들이었다. 이런 철학논문이 나의 전공인 저작권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대학 4년 동안 의무감으로 했을 뿐 한 번도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나,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때 철학 논문을 읽고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인생의 향로를 바꿔 공부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동아리 방을 기웃거리다 천편일률에 질리고, 법철학 강의에 대한 실망감은 해답도 없는 철학공부가 무슨 필요 있나 하는 회의에 빠지게 했으나, 한번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한 영원한 상흔으로 남듯, 철학은 내게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생쌀 씹듯 했던 철학이 재미있게 된 것은 나와 동떨어진 줄로 알았던 형이상학을 나의 전공분야로, 내가 알 만한 말로 풀어 주었던 지도교수와 잘 써진 몇 편의 논문들 때문이었다.

요즘 EBS 교육방송에서 하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하버드대학 강의 녹화물에 한글 자막을 붙인 이 프로그램은 한 편이 1시간 남짓 되는데, 주말에는 한꺼번에 연달아 몇 편을 방영한다. 연속극도 몇 편을 계속 보기가 어려운데 며칠 전에는 채널을 고정한 채 3시간 가까이 보고 있는 내 자신에 놀란 적이 있다. 배고픔의 기억은 이렇게 오래 간다.

철학의 결핍과 갈증은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닌 것 같다. 요즘 대학마다 인문학 고위과정을 개설하는가 하면 유명 CEO들끼리 모여 철학 강의를 듣는 것이 유행이다. 구청 단위 지역문화센터에서 개설하는 철학 강의에 중년 남녀들이 자리를 빼곡히 채우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서가 뒤바뀐 데 있다. 샌델에게 강의를 듣는 그 학생들이 부럽다. 대학 때 배웠어야 할 것을 30년 후에 배우면서 희열을 느끼고 있는데, 내가 30년 전에 그랬듯이 우리의 대학생들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여러 가지로 진단할 수 있겠으나 배우는 자보다 가르치는 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 보니 내가 정확히 아는 부분은 예화를 들면서 여유 있게 설명할 수 있지만, 자신이 없는 부분에서는 어려운 말을 쓰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방영분, 샌델은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수준 높은 쾌락과 수준 낮은 쾌락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한 장면과 만화영화 ‘심슨 가족’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학생들의 토론을 유도하였다. 샌델은 노련한 지휘자였다. 그는 그 부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 강의에서 만화까지 보여주는 철저한 노력을 하였다.

오늘 우리 대학의 현실은 말과는 달리 여전히 기초교양교육을 소홀히 한다. 샌델과 같은 교수가 신입생들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교육을 담당해야 한다. 좁고 깊은 부분을 다루는 강의는 오히려 소장학자가 해도 무방하다. 새로운 것을 같이 공부해 가는 점에서는 그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학의 기초교양교육은 대부분 소장 층에 맡겨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엇박자다. 같이 나가 뛰놀아 달라는 아이의 청을 거절한 아버지는 뒤늦게 아이 방을 노크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방문을 걸어 잠근다. 대학의 교양교육은 가정의 이런 엇박자와 다를 게 없다.

남형두 연세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