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7) ‘임종간호’ 호스피스의 길을 열다
입력 2011-01-17 17:56
의사의 말 한마디가 암세포보다 더 무섭게 그 교수를 짓눌러 무너지게 한 것이다. 환자에게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하다. 수술 후 그녀의 몸무게는 20㎏이나 급격하게 빠졌다.
사실 의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에게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말은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그 말이 맞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경과를 보자”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의 희망이나 잠재력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잘해보자” “최선을 다해보자”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할 것을 다 했습니다.”
의료진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말 때문에 환자와 가족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방 죽을 것으로 받아들인다. 의료진이 포기하고 가족들이 포기하면 환자도 포기한다. 그러나 의사가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도울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환자나 가족들은 이 한마디에 힘을 얻을 수 있다.
이후 첼로 교수는 병원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해 퇴원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의 집에 찾아가 말벗이 돼 줬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그녀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며 죽음을 맞을 준비를 시켰다. 그녀가 최대한 편안히 갈 수 있도록 이야기와 고민을 들어줬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서 직접 호스피스 경험을 해본 이후 나는 호스피스에 대해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됐다. 호스피스의 필요성이 절실히 와 닿았다.
그래서 1979년 10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당시 연세대 전산초 간호대학장의 독려 아래 왕매련 조원정 김소야자 등 동교 교수들과 함께 호스피스 워크숍을 구상했다. 그 당시는 호스피스란 말 자체도 없던 시절이었다.
“호스피스란 말이 너무 생소하니 ‘임종간호’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
전 학장은 호스피스가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것이니까 ‘임종간호’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90년대 중반, 우리가 관리하는 호스피스 환자 중에 서울 고척동 산동네에 살던 뇌암 말기 환자가 있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가락시장에서 지게꾼 일을 하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거의 매일 아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저 미친 놈, 어려서 엄마 잃고 혼자 고생고생해서 키워놨더니 돈도 안 되는 미술사인지 뭔지를 공부하다 끝내 몹쓸 암에 걸려 죽게 됐으니….”
아버지로서는 그런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억울하고 원망스러웠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낮 싸우다 보니 이 환자와 아버지를 돌보는 호스피스팀이 너무 힘들다고 내게 하소연을 했다. 내가 찾아간 그날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공부하고 그림 그리면서 편하게 살지. 분수도 모르고 무슨 역산지, 석산지 한다고 죽을병에 걸려서…. 너는 평생의 원수다.”
아들은 돌아누워서 양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 환자는 이제 마지막 항암치료도 다 끝나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