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지방] 시크릿 가든 현대사

입력 2011-01-16 19:31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 뇌사와 식물인간도 구별 못한 몰상식 드라마를 나도 열심히 봤다. 나같은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마저 사로잡은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남녀 주인공 길라임과 김주원은 영혼이 바뀐다. 몸이 바뀌니 친구도 바뀌고 부모도 바뀐다. 딱 하나 휴대전화는 안 바뀐다. 휴대전화 클로즈업이 잦았던 이유, 간접광고만은 아니었다. 길라임과 김주원을 정확히 호출한 것은 휴대전화뿐이었다. 발신자 표시에 뜨는 이름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주소록에 기록된 바로 그 이름. 기록은 자신이 누군지 말해준다.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비밀의 화원(시크릿 가든)에는 길익선이 등장한다. 소외된 이웃 길라임의 선친이자 사회지도층 김주원을 화염에서 구하고 숨진 소방수였다. 재벌 3세도 스턴트우먼도 자기 살길대로 살아가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 사랑을 빚진 존재임이 비밀의 화원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둘은 서로 사랑해야 했다. 길익선의 희생은 계층 간 갈등 극복과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3년간의 기억을 잃은 김주원에게 모친 문분홍 여사는 왜곡된 기억을 심으려 했다. 기억이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김주원은 간신히 아픈 과거를 생각해낸다. 길라임의 자취방에 달려가 이마에 키스하면서 “정말 사랑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한다. 김주원은 기억을 되찾으면서 과거의 상처를 넘어섰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김주원이다. 마치 엘리베이터만 타면 폐쇄공포증에 시달리듯 역사의 트라우마에 고통 받고 있다. 저마다 기억과 상처가 달라 문제가 더 복잡하다. 아직 6·25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촛불만 봐도 경기를 일으킨다. 또 다른 이들은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것만 봐도 가슴 답답해한다. 군사독재 정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다. 저마다 기억이 다르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만 준다.

대한민국에도 시크릿 가든이 필요하다.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용서와 화해를 이뤄낼 비밀의 화원. 한국만이 아니다. 아시아의 역사, 동남아나 남미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시크릿 가든으로 가는 지도를 애타게 찾게 된다.

오늘 밤 누군가 우리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잊혀진 기억을 찾아주며 치유의 키스를 해준다면. 나는 인류사를 고민하며 그런 환상을 꿈꾸었을 뿐, 길라임의 탱탱한 입술을 멍하니 바라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