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통치가 아닌 정치를 할 때다

입력 2011-01-16 19:32


산을 뽑을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운을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項羽)가 해하에서 한고조 유방(劉邦)의 군대에 포위당해 전의를 상실한 것은 적국 한(漢)의 노래를 듣고서가 아니었다. 자기 나라 초(楚)의 노래를 듣고서였다. 항우는 성 밖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사면초가 四面楚歌)를 듣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초의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초나라 모두가 한나라에 떨어진 모양이라며 마지막을 준비한다.

여당서 들려오는 야당 노래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 낙마 사태를 겪으면서 잠시 사면초가라는 고사를 떠올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지난주 정 후보자가 감사원장으로서 부적격자라며 사퇴를 압박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고위 공직 후보자를 여당이 낙마시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적진에서 적의 노래가 들려오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편이 적과 한통속이 돼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노래를 부르는 격이 됐으니 이 대통령으로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느낌일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청와대로부터 한나라당에 요즘 날씨만큼이나 매섭게 찬바람이 불고 있다. 홍상표 홍보수석은 “여당도 인사에 대해 의사표시를 할 수 있지만 그 절차와 방식은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한나라당을 비난했다. 한나라당이 정 후보자의 거취에 관해 청와대와 사전 조율 없이 부적격 결론을 내리고 일방 발표와 청와대 통보를 함으로써 뒤통수를 맞은 데 대한 극도의 불쾌감 표시였다.

청와대는 또 오는 26일로 잡혀 있던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 만찬을 바쁘다는 이유로 취소해버렸다. 일부 신문은 청와대 한 참모의 말을 인용, 이 대통령이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딱 한 사람, 안상수 대표에게만 감정이 있다고 보도했다. 안 대표가 보온병 포탄 해프닝,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실추된 이미지 만회를 위해 이번 일을 주도했고, 여당의 대표로서 청와대와의 사전 조율 등 필요한 절차를 무시했다는 불만이다.

아군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청와대로서야 자신들의 잘잘못을 떠나 이 정도의 유감 표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도 정권 4년차를 맞아 레임덕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마당에 여당의 반란에 쥐죽은 듯 있을 순 없었을 것이다. “딱 한 사람에 대한 유감” 운운도 사면초가 땐 한쪽만 공격해 탈출구를 마련하듯, 타깃을 극도로 좁혀 반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 효과를 발휘하여 레임덕을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더 험한 꼴에도 대비해야

그러나 이 대통령이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단임제 하에서의 레임덕 현상은 정권이 출범하는 날부터 시작되고 임기 말에 가까워질수록 그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때의 경험을 말하지만 그때는 그가 현직이었던 서울시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권력의 유력한 후보였다. 이번 일도 그렇고,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일부 언론까지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레임덕과 관련이 없지 않다는 건 기자만의 억측인지 모르겠다. 한나라당 내 친이계 인사들이 친박계에도 발을 걸치는 이중 계보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권력이라는 게 그런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선거에 불리한 데도 정의나 의리 때문에 순장(殉葬)당할 정치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 경우에 따라선 시간이 흐를수록 더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도 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감정을 해소하고 여야와 소통하되 우선 여당부터 빨리 추슬러야 한다. 여당으로부터 민심의 동향도 수렴하고, 필요한 일은 설득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여러 차례 브레이크가 걸려 낭패를 본 경험이 있지만, 앞으로는 “내가 옳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의 국정 운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통치가 아닌 정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항우의 얘기로 시작했으니 항우의 얘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항우가 패망의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하늘만 원망했으니 이 어찌 잘못이 아닌가”라고 나무랐다.

백화종 부사장 wjba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