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수지 (16) 절망의 암환자에게 때로는 ‘약보다 詩’
입력 2011-01-16 17:25
1979년 연세대 간호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별관 특실병동의 수간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특실병동은 VIP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곳이다.
“선생님, 저희 병동에 문제 환자가 있는데 오셔서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병동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 병실에선가 거친 욕설이 새어나왔다.
“바로 저 환자예요.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려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은 모 대학의 첼로 교수라고 했다. 수간호사가 “혹시 다칠지 모르니 안경을 벗고 들어가라”고 했지만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는 손으로 안경을 잡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뭐야?”
순간 휴지통이 얼굴로 ‘휙’ 날아들었다. 안경이 튕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얼른 문을 다시 닫고는 놀라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 환자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궁리하던 중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그 시집을 넣어주자.”
당시 나는 ‘삶의 모든 것’이라는 시집을 읽고 있었다. 프랑스의 미쉘 콰스트 신부의 시집이었는데 시 제목대로 삶의 모든 것이 함께 묻어있는 책이었다. 그중 ‘감사합니다’란 시는 10쪽이 넘을 정도로 길었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었다. 가령 아침에 이를 닦을 때 맡게 되는 향긋한 치약 냄새, 신문팔이 아이가 외치는 소리 등 살면서 흔히 접하는 일들에 대한 감사로 가득했다. 그 시를 다 읽고 나면 삶에 대해 절로 감사해지며 숙연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가 생각난 것이었다.
나는 그 시집을 찾은 뒤 ‘감사합니다’란 시가 있는 페이지에 종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환자의 병실 문을 빼꼼히 열고는 재빨리 시집을 환자 침대 쪽으로 휙 던져놓고 돌아왔다.
사흘 후 수간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환자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환자가 시집을 읽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구나.’
나는 이번에는 여유를 갖고 점잖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왜 또 왔어?”
그 순간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또다시 무언가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자 둔탁한 무엇이 내 머리를 지나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환자가 침대 옆 탁자의 작은 서랍을 빼서 내게 던진 것이었다. 환자는 침대 옆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무릎 사이에 박고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양손으로 환자를 확 껴안았다. 온몸이 얼마나 깡말랐는지 마치 딱딱한 나무토막을 안는 것 같았다. 환자가 내 가슴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지가 뭔데! 지가 뭔데!”
환자는 이 말만 연거푸 하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환자가 실컷 울고 진이 빠질 때까지 그녀를 안은 채 기다렸다.
그 교수는 5년 전 오른쪽 유방암 수술을 했다. 그 뒤 암이 재발해서 이번에는 왼쪽 유방을 수술했는데 수술 후 3일째 되는 날 담당 외과의사가 회진을 돌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이제 첼로를 연주할 수 없습니다.”
첼리스트에게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할 수 없다는 말은 삶의 모든 의미를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지가 뭔데. 지가 수술을 하면 했지, 왜 내게 첼로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