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 팩’도 안 가르치는 하나원 탈북자 교육

입력 2011-01-14 18:24

통일부 발주 용역 논문서 “프로그램 부실” 제기

“쌀 다섯㎏ 달라고 하니까. 점원이 5㎏를 말하느냐고 되묻는 거야. 또 쟁개비(밥솥)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니까 쟁개비가 뭐냐고 그러는 거야. 덜컥 겁이 나더라고.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탈북자 A씨)

“점원이 나보고 비닐 팩을 벌리라는 거야. 뭔지 알아야 벌리지. (점원이) ‘눈앞에 있는데’ 하면서 발로 탁 찬 비닐 팩을 받으려다가 뒤로 넘어졌지. 화장실에서 울면서 하늘에 붕 뜬 마음을 알겠더라고. 모르는 게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적응할 수 있나.”(탈북자 B씨)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의 탈북자 적응 프로그램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통일부가 발주한 연구용역에서 제기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난희 연구원이 지난해 31일 내놓은 논문 ‘북한출신 긍정하기가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 정착에 갖는 의미와 역할 분석:북한 출신 긍정하기를 위한 정책 제안’에서다.

탈북자들은 신 연구원과의 심층인터뷰에서 하나원 교육프로그램이 남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탈북자들은 합동심문을 거치면 하나원에 들어가 3개월간 교육을 받으며, 이후 지자체가 운영하는 하나센터에서 3주간 추가로 실생활 교육을 받게 된다.

논문에 따르면, 하나원에서 배우는 언어생활 교재는 ‘쟁개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또 비닐의 경우 탈북자들이 농촌보다는 도시생활을 선호하지만 비닐과 관련된 용어로 ‘비닐하우스’만 소개돼 있다. 또 탈북자 상당수가 여성이지만 주방과 관련된 용어가 세분화돼 있지 않아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문제 말고도 생소한 보험이나 은행 거래 등 기본적인 것들도 적절히 교육받지 못한다고 신 연구원은 주장했다. 탈북자 C씨는 “보험 많이 하지 마라 사기라고 교육한다. 그런데 다리 수술했는데 보험 들었더라면 혜택 있었잖은가”라고 했다.

신 연구원은 탈북자들은 보험을 가입했다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원의 방침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C씨의 경우 깊이 있는 교육이 선행됐다면 보험혜택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지적했다. 신 연구원은 “영어와 한자를 쓰지 않고 살아왔던 탈북자가 겪는 남한 문화의 생경함과 이질감은 대단히 크다”면서 “하나원 교육이 탈북자의 입장과 필요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이수정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이론 위주의 강의식으로 이뤄지는 하나원 교육프로그램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천차만별인 탈북자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집체교육 기간은 줄이고 지역사회에서 실제생활과 접목돼 이뤄지는 적응교육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